항목 ID | GC02200124 |
---|---|
한자 | 主勿淵津 |
영어음역 | Jumuryeonjin |
영어의미역 | Jumuryeonjin Ferry |
분야 | 지리/인문 지리,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터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의창구 북면 외산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주용 |
성격 | 나루터 |
---|---|
원건물 건립시기/일시 | 조선 전기 |
소재지 주소 | 경상남도 창원시 북면 외산리 벌등마을 |
[정의]
경상남도 창원시 북면 외산리 벌등마을 낙동강 변에 있던 조선 전기 나루터.
[개설]
창원 지역 낙동강 강변의 나루는 8000년이라는 오랜 역사를 가졌으나 역사서에 나타나는 나루는 주물연진과 임해진이 유일하다고 할 수 있다.
주물연진에는 낙동강 뱃길과 관련된 전설이 전한다. 옛날에 근우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큰 화물을 싣고 낙동강 뱃길을 이용하여 상경하고 있었다. 아무 문제없이 잘 운항되던 배가 갑자기 임해진 근처에서 암초에 부딪히면서 좌초되어 가까스로 살아남은 근우는 화물을 다 잃고 자신의 삶을 비관해 자살하였다. 그 후로 낙동강 700리 길의 뱃사공을 하려면 근우바위를 알아야 한다는 말이 생겨났다고 한다. 지금도 수면이 낮아지는 겨울철이나 갈수기에는 물속에 숨어 있는 근우바위가 떠오르고 비가 자주 오는 여름철에는 물속으로 사라진다고 한다.
[변천]
주물연진은 30여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배를 타고 창원 지역에서 구하기 힘들었던 땔감을 구하거나 수산장을 보는 데 중요한 교통수단이었다. 배는 창녕군 부곡면 소유였기 때문에 부곡면에 사는 사람들은 배 삯을 내지 않았고 창원 거주 주민들만 부담하였다. 당시 주민들은 지방을 휴대하거나 수확기에는 보리 또는 벼를 내었고 돈은 약 3전을 냈다고 한다. 나룻배가 있던 시절 외산마을 주민들과 강 건너 창녕군 임해진 주민들은 함께 수산장을 다녔고, 경조사를 나누는 등 한동네 주민처럼 살았다. 1990년대 초 인근의 학포나루에서 부녀자를 태운 배가 전복되는 사고로 인해 나룻배 운영 규정이 강화되자 주물연진을 비롯하여 임해진, 학포나루, 본포나루의 나룻배들이 사라지게 되었다.
[위치]
민긍기가 쓴 『창원도호부권역 지명연구』에서는 주물연진을 동읍 노연리로 서술하고 있지만, 현지답사 결과 외산리 벌등마을의 낙동강 변으로 추정된다. 주물연진은 외산리 벌등마을과 창녕군 부곡면 임해진을 남북으로 왕래하기 위하여 세워졌던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는 “주물연진이 창원도호부에서 북쪽으로 40리에 있으며, 칠원현 매포 하류인데 언덕 위에 소공관(小公館)을 설치하여 일본 사신이 배 타고 오가는 것을 접대하였다.”라는 기록이 남아 있어 수상 교통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일본 사신들이 배를 타고 대한해협을 건너 부산과 진해 제포에서 여독을 푼 뒤 육로와 수로를 이용하여 한양으로 가곤 하였는데 주물연진을 거쳐 상경하였던 것이다. 일본 사신들이 주물연진에 도착할 무렵이면 창원도호부에서는 “도호부사를 비롯한 관리들이 마중을 나가 이들을 영접했다”라는 기록이 있다. 곧 주물연진은 뱃길을 이용해서 부산으로 왔던 외국 사신들이 한양으로 가는 길목에서 장거리 여행에 지친 피로를 풀고 잠시 쉬었다 갈 수 있도록 마련된 중간 휴식처이자 교통로 구실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