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04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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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新幹會昌原支會 |
영어의미역 | The Changwon Branch of Singan Association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양미숙 |
성격 | 사회단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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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립연도/일시 | 1927년 10월 20일 |
해체연도/일시 | 1931년 |
설립자 | 주병화 |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창원 지역에 있었던 신간회 소속 지회.
[개설]
1926년 11월 15일 정우회선언을 통해 방향전환론이 제기되면서 6·10만세 사건으로 위축된 사회운동은 새로운 활기를 되찾는다. 그 결과 1927년 2월 15일 비타협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의 통일전선체인 신간회가 결성되었다. 신간회는 창립 10개월 후인 1927년 12월 전국에 100여 개 지회를 결성하고, 1931년 5월 16일 해소될 때까지 130여 개 지회, 회원 4만이 활동한 일제강점기 최대의 사회운동단체로서 활동하였다.
[설립목적]
신간회 창원지회는 조선 민족의 정치적·경제적 각성을 촉진하고 단결을 견고히 하며, 일제에 대한 기회주의적 행동을 일체 부인하는 것을 강령으로 설립하였다.
[변천]
1927년 10월 20일 진해청년회관에서 김종건·주병화(朱柄和) 등이 중심이 되어 결성되었다. 창립 당시 회장은 주병화, 부회장은 김창세였으며, 각 부서는 서무부·정치문화부·조사연구부·선전부 등으로 출발하였다. 1928년 1월 마창사회단체협회에 가입하여 마산 지역 사회운동과 호흡을 같이 하였다.
1928년 2월 결성된 창원청년동맹에는 신간회 창원지회 설립 당시 임원이었던 김한룡·설관수 등을 비롯해 1929년 9월 집행위원으로 활동하게 되는 강호철 등이 청년동맹 창립의 중심인물로 활동하였다. 따라서 신간회 창원지회는 창원청년동맹과 유기적 관계 속에서 창원 지역 사회운동을 이끌었음을 알 수 있다.
이 후 1929년 9월 집행위원장 주병화를 비롯해 검사위원 중심의 집행위원제로 운영하였다. 1931년 1월 신간회 해소를 논의할 무렵에는 집행위원장 배효민, 서기장 주병탁을 비롯해 서무재무부·조사선전부·교육부·조사출판부 등에서 전체 임원 12명이 운영을 담당하였다.
[활동사항]
창원신간회지회는 창립 직후 1927년 11월 간사회를 개최하여 규약 제정, 회원 증모, 가덕도 일본인 순사 발검(拔劍) 상해사실 조사, 상남면 동양척식주식회사 일본인 농감의 부정사건 조사, 창원군 내 각 사회단체 일람표 작성, 창원지회 임시대회 개최 등을 논의하였다. 이어서 한 달 뒤인 1927년 12월 18일 제2회 간사회를 개최하고 사업방향 등을 논의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진해경찰서의 토의금지 조치로 공개적 사업방향을 활발하게 논의할 수 없었다. 이런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창원군 내 각 사회단체 소속원들의 망년회, 신간회본부 대회에 대한 의안, 지방열 고취에 대한 비판, 회비 징수, 매월 월례회 개최, 대회에 특별한 연락 없이 2회 이상 무단 결석자에 대한 제명과 간사회 연 3회 이상 결석자에 대한 해직 건 등을 논의하였다. 이 후 1929년 9월 마산에서 경남 지역 12개 신간회지회들이 연합 결성하려 했던 경남도신간회연합회 구성 단체로서 참가하였다.
[의의와 평가]
1927년 10월부터 1931년 봄까지 민족운동과 사회운동의 통합을 통해 창원 지역 항일운동의 구심체적 역할을 한 점에서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