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04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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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夜學 |
영어의미역 | Night School Movement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남재우 |
[정의]
경상남도 창원 지역의 일제 강점기 초등 교육 기관 기능을 수행한 비정규 교육 기관.
[개설]
일제 강점기 야학은 크게 농민 야학·노동 야학·여성 야학으로 나눌 수 있으며, 국권 회복을 목적으로 애국 계몽 운동·실력 양성 운동·자강 운동 등의 일환으로 설립되고 운영되었다. 야학은 일제 강점기 거의 전 계층의 지지와 참여가 있었던 대중 운동이었으며 1920년대 이후 전국적으로 빠른 속도로 확산되었다. 1920년대에 일제가 경영하던 공립 보통학교가 있었지만 학비가 너무 비싸서 다닐 수 없게 되자 노동자·농민·도시 빈민들이 다닐 수 있는 수업 연한이 비교적 짧은 간단한 초등 교육 기관인 노동 야학이 전국에서 많이 생겨났다.
자료에 따르면 야학의 수는 전국적으로 4만 2000여개에 달하였다. 창원 지역의 경우에도 야학 운동이 활발했는데 1929년 초 『동아 일보』의 보도에 따르면 당시 창원 지역에는 강습소와 야학이 48개에 이르렀다. 야학에서는 농민이나 노동자를 대상으로 주로 한글과 산수 등을 가르쳤는데 이를 통해 문자 해독 능력과 사회에서의 생활 능력을 기르게 하는 한편 민족 의식을 일깨우고 평등 사상을 심어 주었다. 일제는 야학이 확산되자 “교사의 사상이 불온하다”, “교육 내용이 비판적이다”등의 갖가지 이유로 야학을 탄압하였다.
[주요 활동]
1920년대에 『동아 일보』와 『조선 일보』의 창간 이후 그 지면에는 거의 매일 전국적으로 활발하게 설립되고 운영되어 나가던 노동 야학 관계 기사가 실리고 있었다. 마산 노동 야학의 경우는 특히 중요하게 취급되어 『동아 일보』의 경우 1921년에만 17회나 보도되었다. 1921년 9월 기사에는 교사와 학생 5명으로 노동 야학 선전대를 조직하여 인근 창원 지역을 비롯한 의령, 진동, 중리, 석전 등지를 순회하였다는 내용이 보도되었다. 야학생 박건수는 ‘노동 야학 급무를 부르짖음’이란 주제로, 교사 이기호·김두식은 각각 ‘노동과 지식’, ‘농촌의 개선책’이란 주제로 선전과 계몽 운동을 전개하여 주민들의 큰 호응을 받기도 하였다.
야학이 전국적으로 본격화되는 시기는 1920년대인데 비하여 마산의 야학은 1907년 7월 국내 최초로 노동 야학이 설립되었다는 데 의의가 있다. 민족 교육에 뜻을 품은 옥기환·구성전 두 사람이 자금을 출자하고 명도석·김명규·나인환·팽삼진 등 조국의 암울한 현실을 우려했던 청년 지식인들이 교사로 참여하는 ‘마산 노동 야학’이 탄생하였다. 학생들은 선창 어시장의 노동자를 비롯한 농민 및 집안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이었다. 처음에는 마산시 남성동 69번지의 조그만 창고에서 20~30명의 학생으로 문을 열었으나 날이 갈수록 학생이 증가하여 7년 후에는 140평 규모의 교사를 창동에 마련하였다. 수업 연한은 1년으로 한글을 주로 가르쳤다. 교사 모두가 민족 의식을 지닌 신지식 젊은이들이었으므로 수업도 국가의 장래를 걱정하고 사회 문제에 대한 관심을 고취하는 내용이 중심이었다.
마산 노동 야학은 마산 구락부가 마산 학원을 설립하여 경영을 맡으면서 마산 중앙 야학교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마산 중앙 야학교는 1931년 유지들이 뜻을 모아 6000원이란 거금을 마련하여 마산시 중성동에 대지 1000여 평을 매입하고 이곳에 교실 5개, 사무실, 회의실, 사택 2동을 갖춘 새 교사를 신축하였다. 이 학교는 규모나 시설 면에서 농촌 지역의 공립학교보다도 우수해서 『동아 일보』에 ‘전국에서 가장 하이칼라 학교’라고 보도되기도 하였다. 1936년에는 중학교 진학 준비를 위한 보습 학원을 병설하여 운영하기도 했다.
마산에는 여성 야학도 설립되었다. 정지석 여사가 부녀자들의 교육을 위해 부인 야학을 설립하였다. 1921년에 교육의 내실을 위하여 마산 구락부에 운영을 맡기면서 명칭도 마산 여자 야학교로 바뀌었다. 마산 여자 야학교는 1921년 6월 마산 여자 청년회를 설립하여 여성의 사회 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일본인 거류지인 신마산 일대에도 월영리 주민이었던 권숙경·김태엽·조민환 등이 힘을 모아 ‘노동 야학’을 창설했는데 학생수가 140여명이었다. 1923년 12월에는 30평 정도의 교사를 새로 마련하고 400여명의 주민이 참여한 가운데 낙성식을 개최하였다.
이외에도 1923년 9월부터 창신 학교에서 운영한 ‘부인 야학’을 비롯해서, 1926년에는 부둣가 어시장에서 장사를 하며 살아가던 영세 상인들의 자녀 교육을 위하여 ‘어시장 노동 야학’이 설립되는 등 마산 각지에서는 수십 곳에 이르는 야학이 운영되었다.
[교육 내용]
당시 창원군 내서면 산호리에 있던 산호리 야학에 다녔던 분이 기억하고 있는 야학에서 배웠던 노래이다. 제목은 알 수 없다.
1.
“정월이라 대보름 명절이건만
남산처녀들은 달맞이가네
달구경이 좋아도 나는 안가요
우리 누나 변또 끼고 공장일가네
나는 나는 책보 끼고 학교에 가요
가난하면 슬프다고 누가 합디까
우리집이 가난해도 나는야 재밌어요
가갸거겨 좋은 책을
옆에다 끼고 학교에 가요
부잣집 아이들은 유리영창
넓은 곳에서 책상 위에서
이찌 니 산 배우지만
우리들은 배새는 초가집 등불 밑에서
가갸거겨 공부를 해요”
2.
“아버지의 더운 한숨
어머니의 눈물 속에
세상같은 담사포(?)
우리 무산형제야
이밋게(의미있게) 싸워라
철을 당하여
우리 무산형제야”
3.
“우리들은 약한 자
적대 당코 압박받은 우리들
노동자들아 단결하자
우리들의 피와 땀으로 뭉쳐라”
이러한 노래를 통해서 볼 때 야학에는 민족 정신의 고취와 계급 타파의 분위기가 깔려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일제 강점기 야학에서의 교육 과정은 비교적 간단했는데 수업 연한이 보통 1년이었다. 일제 강점기의 노동 야학은 일제의 식민지 교육 정책에 저항하면서, 교육의 기회를 얻지 못했던 조선의 노동자들을 위해서 진보적인 지식인이 이끌고 노동자들이 주체가 된 계몽 운동으로 전개된 민족적인 대중 교육 운동의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