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06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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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土器 |
영어의미역 | Pottery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
시대 | 선사/선사,고대/고대 |
집필자 | 이성주 |
[정의]
경상남도 창원 지역에서 출토된 점토로 빚고 불에 구어 만든 그릇.
[개설]
후기 구석기 시대부터 인류는 점토의 가소성과 소성했을 때 단단하게 굳어지는 특성을 이용하기 시작했지만 그릇을 만들어 쓰지는 못했다. 후빙기의 시작을 전후하여 정착 생활을 하게 된 집단이 처음으로 점토로 만든 용기, 즉 토기를 본격적으로 제작 사용하였고 농경 사회의 기본 도구로서 다량의 토기가 제작 사용되기에 이르렀다.
청동기 시대 계급 사회가 등장하고부터는 분묘에 부장하기 위해 특별히 붉은간토기나 검은간토기도 생산하게 되었다. 사회가 발전하면서 토기의 생산은 점점 전문화되었고 기술도 발전하였다. 특히 원삼국 시대가 되면 중국의 회도 기술이 수용되어 타날 기술로 성형하고 가마 안에서 환원 소성하는 기술도 보급되었는데 원삼국 말기에는 고온 소성과 물레를 이용한 대량 생산도 가능했다.
이와 같이 토기는 무른 회색의 와질토기에 출발하여 점차적으로 고화도의 도질 토기로 발전하였다. 삼국 시대에는 고분과 취락에서 토기가 대량 출토되어 도질 토기의 전문 생산이 전성기에 달하였음을 알 수 있다. 통일 신라 말에는 자기의 생산이 본격화되는데 이때부터 일상용 허드레 그릇은 토기로, 식기나 다기와 같은 고급 그릇은 자기로 만들어 쓰게 되었다.
[변천]
우리나라에서는 신석기 시대의 시작을 토기의 출현으로 정의한다. 약 8000년 가까이 지속된 신석기 시대 동안 지역과 시기에 따라 다양한 토기가 사용되었다. 창원 지역을 포함한 남해안 일대에서는 주거지와 조개더미에서 신석기 시대 토기가 많이 출토되는데, 문양의 형태와 시문 방법에 따라 융기문 토기에서 압인문 토기와 침선문 토기로 변천하다가 이중구연 토기로 신석기 시대 토기는 막을 내린다.
창원에서는 신석기 유적이 흔치 않은데 침선문계 빗살무늬가 동읍 산남리 합산 패총, 진해시 안골 패총, 수동 패총 등에서 토기가 채집된 바 있다. 그중 안골 패총에서 출토된 것은 말기에 속하는 퇴화형 빗살무늬 토기이다. 진해시 남양동에서는 신석기 시대 중기와 후기에 속하는 마을 유적이 발굴되어 주거지에서는 수가리Ⅱ식과 봉계리식의 빗살무늬 토기가 출토되었다.
청동기 시대에 접어들면 무문 토기가 유행한다. 청동기 시대가 시작되면서 등장하는 토기는 각목돌대문 토기이며 이 시기의 집 자리들은 주로 강안 충적지에서 발견된다. 창원 일대에서는 강안 충적지의 조사가 충분히 이루어지 않아서인지 각목돌대문 토기 주거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창원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무문 토기는 공열문과 단사선문이 함께 하는 전기의 흔암리형 토기이며 성산 패총의 하부 문화층에서 발견되었다. 창원 지역에서는 청동기 시대 중기에 속하는 유적이 가장 많다. 중기의 유적은 대소 규모의 취락, 및 석관묘군과 고인돌군이 있다. 취락유적인 창원 남산 유적, 마산합포구의 망덕리 유적과 현동유적, 동읍 용잠리 유적에서는 이른 바 송국리형 토기가 출토된다. 송국리형 토기는 목이 약간 축약된 대, 중, 소형의 저장용 항아리와 중, 소형의 바리가 출토된다. 같은 시기의 창원 시내의 상남동과 동읍의 덕천리의 바둑판식 고인돌을 중심으로 분묘군이 조성되어 있고 진동만의 좁은 해안 평야에는 묘역식 고인돌과 석관과 대규모로 밀집된 유적군이 형성되어 있다. 이웃한 신촌리 유적, 망덕리 유적, 덕곡리 유적, 현동 유적 등에서는 석관묘 십 수기씩 무리를 이루고 있다. 이와 같은 청동기 시대 중기의 분묘에서는 많은 양의 토기가 출토되는 것은 아니지만 붉은간 토기가 한 점씩 부장품으로 발견된다.
창원시 원삼국 시대의 대표적인 유적은 창원 시내의 성산 패총, 남산 패총, 내동 패총과 도계동 고분군, 그리고 동읍의 다호리 유적이 있다. 이 시기 분묘에서는 주로 와질 토기가 출토되며 패총 유적에서는 와질 토기나 늦은 시기의 도질 토기도 출토되지만 일상용 토기인 적색 연질 토기의 비중이 압도적이다.
삼국 시대의 유적으로는 창원 시내의 도계동 고분군, 가음정동 고분군, 반계동 고분군, 천선동 고분군, 동읍의 다호리 고분군, 마산합포구의 현동 고분군, 대평리 고분군, 합성동 고분군 등의 고분군이 곳곳에 분포한다. 당시 주거 유적으로는 진해의 용원 유적을 비롯하여 석동 유적, 동읍 일대의 신방동 유적과 창원동 중학교 부지 유적 그리고 창원 시내의 가음정동 유적과 반계동 유적, 중동 고분군 등이 조사되었다. 고분군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도질 토기가 출토되고 생활 유적에서는 적갈색 연질의 옹과 발, 시루 등의 일상용 토기가 주로 발견된다. 6세기 전반 경에 속하는 토기요지가 창원 의창구 중동 유적에서 2기가 발굴되었는데 토기는 인근 고분군에 출토되는 대가야계 토기에 속한다.
[유형]
1. 송국리형 토기
청동기 시대 중기의 대표적인 토기로 우리나라 중서부 지방과 남해안에 분포한다. 창원 지역의 송국리 토기는 남산 유적에서도 확인되는데 그릇 모양이 중서부 지방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이 지역에는 목이 높게 바로 선 호형 토기와 끝이 약간 내경하는 발형 토기가 많은데 비해 중서부 지방에 유행했던 구연부가 짧게 외반한 호형 토기는 볼 수 없다.
2. 와질 토기
창원 다호리에서는 원삼국 시대 전기의 목관묘군이 발굴되어 이 시대를 대표하는 유적이 되었다. 다호리 고분군에서 확인된 파수부 장경호, 주머니호, 승석문 단경호 등을 표지로 하는 전기 와질 토기군은 시기적인 서서히 변해가는 양상이 잘 파악되어 당시의 토기 편년에 기준이 된다.
3. 삼국 시대 도질 토기 양식
삼국 시대 영남 지방의 도질 토기는 신라 양식과 가야 양식으로 대별되며 가야 양식은 금관가야, 대가야, 아라가야, 소가야 양식으로 구분될 수 있다. 창원 지역에는 독자적인 가야 토기 양식이 따로 존재했다기보다 시기에 따라 서로 다른 주변 지역 토기 양식의 영향을 받아 왔다.
4세기경에 도계동·가음정동 고분군에서는 금관가야 양식과 아라가야 양식이 섞여 있었으나 5세기에 가까워지면서 점차 아라가야 양식이 우세해졌다. 6세기에 접어들면 반계동 고분군과 중동 고분군에서 보는 것처럼 잠시 고령의 대가야 양식 토기가 확산되어 들어온다. 특히 중동 고분군에 인접하여 삼국 시대 토기 가마 2기와 폐기장이 발굴되었는데 이로부터 출토되는 토기는 모두 대가야 양식이었다. 창원 지역에서 대가야 양식 토기는 그리 오래 발전하지 못하였고 6세기 후엽에 가까워지면서 신라 양식 토기가 창원 지역으로 유입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