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07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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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寧金氏 |
영어의미역 | Gimnyeong Gim Clan |
이칭/별칭 | 금녕김씨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정대 |
묘소|세장지 | 소산재 - 경상남도 창원시 성산구 사파정동 111-7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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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김시흥을 시조로 하고 김정무를 입향조로 하는 경상남도 창원시 세거 성씨.
[개설]
김녕은 지금의 김해(金海)를 가리키는 말이다.
[연원]
김녕 김씨의 시조는 김시흥(金時興)으로, 신라 경순의 넷째 아들 김은열(金殷說)의 9세손이니 경주 김씨 시조 김알지(金閼智)의 39세손이다. 이와 같이 김녕 김씨는 경주 김씨에서 번져 나온 씨성의 하나다. 고려 시대 평장사 김시흥이 인종 때 묘청(妙淸)의 난을 평정하고 명종 때는 조위총(趙位寵)의 난에 공을 세워 김녕군(金寧君)에 봉해짐으로써 김녕 김씨가 탄생하게 되었다. 단종 복위 운동에 깊이 관여한 백촌(白村) 김문기(金文起)[1977년 9월 22일 국사 편찬 위원회는 『조선 왕조 실록』에 근거하고 학술적인 연구와 위원회의 토론을 거쳐 육신의 한 사람으로 판정함]는 김시흥의 9세손이다.
김시흥 이후로 고려조에서 벼슬을 한 사람으로는 병부 상서 김상, 공부시랑 김극세(金克稅), 형부 시랑 김중원(金重源), 문하 시랑 김현(金峴)이 있다. 조선조에서 벼슬을 한 사람으로는 대사헌 김광저(金光儲), 호조 판서 김순(金順), 이조 판서 김관(金觀), 공조 판서 김문기 등이 있었다. 조선 후기 학문과 문장으로 이름난 소산(小山) 김기호(金琦浩)[1822~1902]는 김문기의 13세손이다. 김기호는 성재(性齋) 허전(許傳)의 제자로 1861년에 소산재(小山齋)를 지어 창원 지역 후학들에게 학문을 가르치는 한편, 유계(儒契)를 모아 시 창작에도 남다른 솜씨를 보였다.
[입향 경위]
김문기가 단종 복위 운동에 깊이 관여함으로써 병자 정난(丙子靖難)으로 순절하자 그의 아들 김인석(金仁錫)과 손자 김덕지(金德知)가 함께 화(禍)를 피해 군위·자인 지방에서 살았고, 김덕지의 아들 김정무(金鼎武)는 유랑하다 1508년(중종 3) 창원으로 들어와 정착함으로써 이 지역 입향조가 되었다.
[현황]
김녕 김씨는 창원시 성산구 사파정동[옛 창원군 상남면 사파정리], 의창구 북면 대촌리, 의창구 대산면 상리 등에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다. 소산 김기호의 현손인 김형만(金炯滿)[1912~1969]은 1952년 당시 창원군 상남면과 웅남면에서 최초의 중학교인 남면중학교[지금의 창원 남중학교]를 설립하여 초대 이사장으로 취임한 교육자였다. 그의 현손인 김정술(金汀述)은 이 학교 교장을 역임한 교육자이고, 전 동남 은행장을 역임한 김정규(金禎圭)는 김기호의 6세손이다.
[관련 유적]
소산 김기호가 강학을 위해 1861년 사파정 마을 뒤쪽 비음산 아래에 지은 소산재(小山齋)가 있다. 지금의 소산재는 창원의 도시 계획에 의해 1995년에 다시 옮겨 지은 것인데, 창원시 성산구 사파정동 111-7번지에 위치해 있다. 또한 김호원(金鎬源)이 지은 김기호 묘갈명(金琦浩墓碣銘)이 『창원 군지』에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