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07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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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商山金氏 |
영어의미역 | Sangsan Gim Clan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태성 |
[정의]
김수를 시조로 하고 김한을 입향조로 하는 창원시 세거성씨.
[개설]
상산은 경상북도 상주(尙州)의 옛 지명이다. 상락군(上洛郡), 사벌주(沙伐州)라고도 한다.
[연원]
상산 김씨는 신라 김알지의 후손이라고 하나 정확히 고증할 수는 없다. 상산 김씨의 시조 상산군 김수(金需)는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후손으로 고려 시대 보윤(甫尹)을 지내고 상산군(商山君)에 봉군되었다. 이후 상산을 본관으로 삼았다. 상산군 김녹(金祿)의 세 아들인 김득배(金得培), 김득제(金得齊), 김선치(金先致)는 삼원수(三元帥)로 고려 때 이름을 떨쳤다. 조선 시대에는 좌의정 김귀영(金貴榮), 대사헌 김덕함(金德諴), 판서 김우석(金禹錫)·김연(金演)·김동필(金東弼) 등이 배출되었다. 고려 후기 직제학 김후(金後)가 관직을 버리고 경상남도 단성(丹城)에 은거하고 호를 단구(丹邱)라고 하였다.
[입향 경위]
상산 김씨의 창원 입향조는 판윤(判尹) 김한(金漢)으로, 김해에서 창원 석산(石山)으로 이거하였다. 그의 아들이 김명윤(金命胤)인데, 김명윤은 문장과 무인으로서의 위업이 뛰어나 명나라 황제로부터 쌍검을 하사받았다. 근세의 인물로 김호원(金鎬源), 김상항(金相項)이 학문과 문장으로 이름났다. 창원 동읍의 석산·금산·금동, 북면의 대천·내산 등에 분포하는데 대개 동읍 석산을 종주로 한다.
김명윤이 쓴 『동산정기(東山亭記)』에 그 계대와 창원 입향 경위를 상세히 기록하였다. “우리 김(金)가는 첫 조상이신 보윤공(甫尹公)에서 비로소 상산을 본관으로 하여 지금까지 20세를 내려오니 그 연대가 아득한데 대대로 시골에 살아 다 고찰할 수 없다. 조선에 이르러 8대조 제학공(提學公)께서 단성(丹城) 법물리(法勿里)로 물러나 사셨다. …[중략]…7대조는 정언공(正言公)이며 6대조는 사간공(司諫公)과 아우 지평공(持平公), 박사공(博士公)이다. 이로 인하여 세상 사람들이 단성의 삼옥당(三玉堂)이라고 칭한다. 5대조는 진사공(進士公)으로 처가로 인하여 창령(昌寧) 창락리(昌樂里)로 이주하여 살았다.
고조부는 참봉공(參奉公)이고, 증조부는 진사공(進士公)이며, 조부는 판윤공(判尹公)이다. 아버지는 참판공(參判公)인데 김해부(金海府) 북문 바깥의 답곡리로 이사하여 30여 년이 되었다. 정해(丁亥) 7월 11일 선친의 상을 당하였고, 이후로 더욱 적막하고 외로운 가운데 3년을 지냈다. 기축(己丑) 겨울 창령부 동쪽 도산리로 이주하기로 결정하였다. 도산은 나의 외조부 참찰(監察) 전의(全義) 이공(李公)께서 사시던 곳이다. 부사(府使)를 지내신 외삼촌 명하(明河)와 이웃을 하였다. 도산의 동쪽에 비로소 정자를 하나 지었는데 편액을 ‘동산(東山)’이라고 하였다. 정자의 위치가 회산(檜山)의 동쪽이고, 도산의 동쪽에 있어서 붙인 이름이다.”
또한 그의 후손 김상수(金相壽)가 지은 『동산정중건상량문(東山亭重建上樑文)』에는 “동산정(東山亭)은 우리 판서공(判書公)께서 꾸민 것이다. 옛 문창의 아름다운 곳에 석교(石橋)의 긴 포구를 바라보면 푸른 갈대가 가을 물에 출렁이는 지방이다. 인접한 위양의 아름다운 고을은 푸른 버들이 너울대는 세 오솔길이 아름답다. 임진년의 큰 난리를 당하여 그 공이 공신록에 일등으로 기록되어, 선조 임금 때 관직으로 두터운 정삼품(正三品)의 은대(銀臺)를 받아 관로(官路)에 청직(淸職)을 두루 맡았다. 그리고 나이가 늙기를 기다리지 않고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나 유유자적하게 노닐며 평생을 살았다.” 하여 동산정의 경치와 김명윤의 행적을 기록하였다.
[현황]
상산 김씨는 창원시 의창구 동읍 석산 마을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조선 중기 무인으로 중국에까지 이름을 떨친 동산공 김명윤의 후손들이다.
[관련 유적]
창원시 의창구 동읍 석산리에 김명윤의 유품인 쌍검과 묘와 동산정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