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15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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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建築 |
영어의미역 | Architecture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
집필자 | 이호열 |
[정의]
경상남도 창원시의 전통 건축 및 근대 건축, 현대 건축.
[개설]
건축은 구조적으로 안전하면서도 공간 형태면에서는 예술적 감흥을 주어야 한다. 이를 위해 견실한 구조와 편리한 기능, 예술적인 미를 동시에 추구해야 한다. 창원 지역은 1974년부터 본격적으로 산업 단지가 조성되고, 1980년대 초 경상남도 도청이 이전하면서 크게 발전했다. 도청 이전으로 인구가 증가하고 택지 분양이 활성화되면서 산업 도시와 행정 도시의 기능을 겸한 도시로 발전했다. 1984년의 도시 기본 계획 수립과 집행은 도시 공간과 건축의 면모를 일신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로부터 창원의 현대 건축은 급속히 발달하였다.
[창원의 지역성과 건축 문화]
현재 창원시의 지역성을 정의 내리자면 주인이 없는 동네라는 의견이 있다. 창원시가 행정 구역 상으로 독립한 이후 20여 년의 세월이 지났음에도 신도시의 특성을 갖고 있는 이유는 1990년대를 전후하여 유동 인구가 많았음을 의미한다. 이렇듯 유동 인구가 많아 공동체적인 유대감이 적기 때문에 창원시에는 다른 도시들에 비해 한국의 유명 건축가들이 설계한 건축물들이 많다. 현재 창원시에서 활동하는 건축가들 또한 타 지역 출신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600년 역사를 간직한 창원시는 역사적인 유적들이 많이 남아 있다. 가야 시대 혹은 신라 시대에 창건되었다는 성주사, 조선 시대 창원 향교와 운암 서원, 창원 대도호부 창원 읍성 등은 창원의 대표적인 역사적 건물이다.
1980년대 후반부터 현대 건축물들이 건립되기 시작하였고 이 시기를 전후하여 창원시의 인구가 급속히 증가했다. 인구 증가는 중앙로 주변의 상업 업무 지역에 공공 업무 시설과 상업적 건축물들이 건립되는 동인이었다. 따라서 창원의 주요 현대 건축물들은 계획도시로서의 특성상 주로 중앙로 주변의 중심 상업 업무 지구에 집중되어 있다.
[전통 건축]
1. 불교 건축
창원의 불교 건축으로는 성주사와 봉림사지에 남아 있는 석탑 및 성주사 대웅전이 있다. 성주사 삼층석탑[경상남도 유형 문화재 제25호]은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고려 시대 석탑이다. 지귀동 봉림사지에 남아 있는 봉림사지 삼층 석탑[경상남도 유형 문화재 제26호]은 전체적인 양식과 조립 수법으로 보아 고려 시대 중반 이후에 건립된 석탑으로 추정된다. 1층 탑신의 네 모서리에 기둥 모양을 새긴 것 외에는 특별한 장식이 없으며, 2층 탑신에 문비(門扉)[문짝, 대문]를 조각했으며, 옥개석 밑면에는 4단의 받침 있고, 낙수면의 경사는 급한 편이다.
성주사 대웅전[경상남도 유형 문화재 제134호]은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조선 후기 다포계 맞배집이다. 포작(包作)[공포(栱包)를 짜 맞추는 일]은 외3출목 내4출목이다. 주심 첨차는 끝을 직절(直切)한 후 밑을 교두형으로 처리했으며, 출목소첨차는 끝을 사절(斜切)하고 하단부에 연화문을 새겼다. 배면 공포는 내·외 출목수가 정면보다 하나씩 적은 외2출목, 내3출목이며, 살미 첨차는 짧은 교두형(翹頭形)이다. 전반적으로 부재가 견실하고 치목 수법이 정교하여 조선 후기 다포계 건축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2. 유교 건축
조선 시대 유교 건축으로는 소답동에 있는 창원 향교 대성전[경상남도 유형 문화재 제135호]과 관술정이 대표적이다. 창원 향교에는 대성전, 동무·서무를 비롯하여 명륜당과 동재·서재, 풍화루가 남아 있다. 대성전은 다포계 건축의 특징이 절충된 정면 3칸 측면 4칸의 조선 후기 주심포계 맞배집이라는데 특징이 있다.
내리동 반룡산 남동 기슭의 군부대에 있는 관술정[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124호]은 본래 창원 향교 서편에 있던 육영재(育英齋)로, 회산 감씨 문중에서 매입하여 1877년(고종 14)에 이 자리에 옮겨 지은 것이라 한다.
3. 전통 주택
창원 지역의 전통 주택으로는 소답동 김종영 생가[등록 문화재 제200호]와 ‘창원의 집’이 대표적이다. 김종영 생가는 일제 강점기에 지은 근대 한옥으로 재목 치목이 정교하고 비례가 아름다우며, 전통적인 한옥의 형태를 유지하면서 수납공간과 높은 다락, 미서기 유리문과 출입구 상부의 채광을 겸한 환기창 등 전통 한옥에 근대 건축의 요소를 절충한 형태이다.
창원시 사림동에 있는 ‘창원의 집’은 1898년 순흥 안씨 안두철이 거주하던 집으로, 경내에 솟을 대문·중문·곁문·사랑채·안채·정자·팔각정·연자방아 등이 배치되어 있어 조선 후기 창원 지방 상류 주택의 공간 구성을 잘 보여준다.
[근대 건축]
1876년 부산에서 시작된 조선의 개항 물결이 확대되면서 1899년에 이르러 마산포도 군산·성진과 함께 항구를 대외적으로 개방하기에 이른다. 이 당시 항구로서 좋은 여건을 가진 마산포를 선점하기 위한 러시아와 일본의 세력 다툼은 더욱 치열했다.
러시아가 군사적 목적의 부동항을 얻기 위해 우선 조선 정부와 마산포 저탄소(貯炭所) 설치에 관한 협약을 체결하였으나 이를 간파한 일본이 러시아가 목적한 토지를 미리 매입해버림으로써 러시아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러시아는 단념하지 않고 마산포 남쪽의 율구미[현 마산 가포동의 국립결핵병원에서 MBC 송신소에 이르는 바다 쪽으로 돌출한 지역]를 얻어 1900년 6월 4일 30여만 평의 러시아 단독 조차지를 설치하였다. 이에 뒤질세라 일본도 1902년 5월 17일을 기해 자복포[옛 한국철강과 월영동 아파트 단지, 옛 국군 통합 병원 일대]에 일본 전관 거류지 30여 만 평을 설치하였습니다. 이미 설치되어 있던 신마산 각국 공동 조계지 인근에 러·일의 단독 조계지가 추가되는 기현상이 생겼다.
이처럼 마산항에 조계지가 형성되면서 많은 외국인들이 거주하게 되었고, 이들을 중심으로 외래 건축이 마산항과 진해 등지에 지어지게 된다. 마산항 율구미에 주둔했던 러시아 해군의 사관 및 부영사 가족사진을 보면 뒷 건물에 사용된 재료는 형태를 보아 조선 현지에서 구한 것이 아니라 러시아에서 조달한 것으로 보인다.
개화기 당시 러시아와 일본을 비롯한 각국은 마산의 조계지를 중심으로 영사관 등 외교 관련 시설을 지었던 것으로 보이나 모두 헐리고 현존 하는 건물이 없다. 1899년에 지은 러시아 영사관은 목조 2층 건물로 1, 2층의 앞쪽에 베란다를 둔 방갈로 풍에 가까운 형식이었다. 러시아 영사관은 현 월포 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다고 전한다.
개항기를 거쳐 1905년이 되면 통감부가 설치되는데, 통감부는 한반도의 식민 통치를 위해 행정권을 철저히 장악, 지배력을 강화했다. 이때 일제는 마산항에 있던 영사관 건물을 헐고 1908년 그 자리에 새 건물을 지어 이사청으로 사용했다. 마산 이사청은 목조 2층 건물로 현 경남 대학교 평생 교육원 자리[옛 창원군청]에 있었다. 통감부는 이사청뿐 아니라 외청(外廳)으로 철도 관리국·법원·재정 감사청·관측소·영림창(營林廠)·우편국 등까지 설치하며 사실상 행정·입법·사법의 전권을 장악했다.
이와 관련된 건물들이 건축되었던 것으로 짐작되나 대부분 도시 개발로 헐려 남은 건물은 진해 우체국 뿐 이다. 마산의 우편국은 이보다 훨씬 빠른 1899년 11월 16일 현재의 남성동 제일 은행 터에 있었던 옛 창원 감리서에서 개설되었으나 현존하지 않는다.
창원시 진해구 백구로 40[통신동 1]에 있는 진해 우체국(鎭海郵遞局)[사적 제291호]은 1912년 준공된 1층 목조 건물로서, 우편환 저금, 전기 통신 업무를 취급하던 청사였다. 진해 최초의 체신 업무는 1910년 4월 일본 해군이 임시 해군 건축부 가청사를 현동에 설치하면서, 그 가청사 앞에 같은 해 9월 현동 우편소인 우편국 분소를 설치한 것이 시초이다.
1911년 7월부터 시가지 건축 공사가 활발해짐에 따라 시가지에 일본인 입주가 급격히 증가하여, 모든 통신 업무도 급증하였다. 현동과 시가지는 거리가 멀어 시가지 입주자들이 시내에 우체국 설치 운동을 벌였다. 급격히 팽창해가는 체신 업무로 인해 가건물로는 협소하고 전화 업무도 취급할 수 없어서 1912년 4월 30일 지금의 중원 로타리에 가깝게 진해 우체국을 신축하게 되었다. 진해 우체국의 설계자와 시공자는 알 수 없다. 지붕은 동판으로 덮고 사방에 동재로 난간을 두르고 자연광을 충분히 받을 수 있도록 반원형 채광창을 설치하였다. 정문 입구의 양측에는 배흘림이 있는 터스칸 오더의 두리기둥을 세워 강조했다.
한편 1904년에는 뒷날 봉암동 수원지를 건설한 본전추오랑[本田搥五郞], 경찰서와 일본인 소학교[현 월영초등학교] 등을 건축한 천해신시(淺海新市) 등의 토목·건축 청부업자들이 마산에 들어와 살면서 거류지 내의 각종 건설 사업에 손을 댔다. 이처럼 외국인 건축 및 토목 기술자들이 대거 들어와 마산에 들어와 활동하게 되면서 마산 지역의 건축 기술 수준도 향상되었으며, 이로 인해 점차 근대적인 건축을 설계 및 시공할 수 있는 토대가 구축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 교통의 발달은 철도가 선도하였다. 1904년 1월에 마산과 삼랑진을 잇는 마산선이 착공되었으며, 마산선은 삼랑진에서 경부선과 접속되었다. 마산선의 종착역인 마산역은 일본인들이 사용하기에 편리하도록 조계지에서 가까운 곳, 지금의 마산 중부 경찰서 건너편 벽산 블루밍 아파트 단지 일대에 있었다. 철도가 진해까지 연결되면서 1926년 11월 진해에도 진해 역사(驛舍)[등록문화재 제192호]가 건축되었다. 목구조 단층 건물로 벽체는 시멘트 뿜칠[시멘트 뿜칠 재료를 뿜어 붙여 다양한 색상과 결이 드러나도록 마무리]되어 있으며, 지붕은 맞배 형태로 전·후면에 각각 박공을 설치되어 있다.
이 무렵 외국 금융 회사들이 국내에 침투하기 시작했으며, 1878년 일본 제일 은행 부산 지점은 이 땅에 들어 온 최초의 외국 금융 업체였다. 마산에는 그로부터 27년 후인 1905년 12월 25일 제일 은행 마산 출장소가 개설되었으며, 2년 후 마산포에 있던 제일 은행 마산 출장소는 1907년 현 월남동 성당 자리에 새 건물을 지어 이전하였다.
제일 은행 마산 출장소 외에 진주 농공 은행 마산 출장소, 마산 금융 주식회사, 창원 지방 금융 조합도 이 시기에 문을 열었다. 1918년에 식산 은행 마산 지점은 남성동 현 제일 은행 자리에 있었다. 벽돌조 1층 양식으로 1970년대까지 남아있었다.
마산이 근대 도시로 성장하면서 유입된 대표적 산업인 양조업은 1904년 1월 일본인 동충용(東忠勇)에 의해 세워진 아즈마(東) 양조장이 효시였다. 1905년 창업한 석교(石橋) 양조장의 공장은 1914년에 지었으며 서성동에 있었다. 맞배지붕의 이 공장은 양조장의 기능을 우선 고려한 단순한 외관의 맞배지붕 건물로 형태와 사용 재료에서 근대적인 성격이 잘 드러나 있다.
근대 문물의 유입과 함께 마산에도 근대식 학교가 세워지게 된다. 현재의 성호 초등학교는 1901년 4월에 개교하여 한국인들이 다닌 소학교로, 창원군에서 마산으로 이전 개설한 공립 소학교였다. 마산 공립 소학교는 1904년에 지방 유지들의 성금 2,000여원으로 교사(校舍)를 지었고 1911년 마산 공립 보통 학교로 교명이 바뀌었다. 1904년에 지은 교사의 모습은 알 수 없고 1927년에 벽돌조 2층으로 지은 벽돌조 교사(校舍)의 사진만 남아있다. 지붕에 도머창을 둔 2층 규모의 벽돌조 교사로, 운동장에 면해 교실을 일렬로 배치하고 그 뒤쪽에 복도를 두었다. 창은 키가 큰 오르내리창으로 되어 있다.
일본인 거류민이 늘어나면서 일인 자녀의 교육을 위한 학교도 설립된다. 1902년 11월 조계지 내 남쪽 끝 해안의 한옥을 한 채 빌려 일본 불교 정토종 개교사(開敎師) 삼우전지문사(三隅田持門師)가 세운 마산포 일본인 소학교는 1904년 6월에 설립된 마산 심상 소학교에 합병되었다. 1906년 9월 마산 일본 거류민단의 단립(團立) 마산 심상 고등 소학교로 바뀌었고 1908년 2월 지금의 월영 초등학교 자리에 교사를 지었다. 마산 심상 고등 소학교의 고등과가 후에 마산 중학교[현 마산 고등학교]가 된다. 1908년에 지은 마산 심상 소학교 교사는 지붕에 도머 창을 둔 ㄱ자형의 단층 건물로, 규모는 작으나 건축 세부에 상당히 세심한 배려를 한 건축이다. 특히 교사 전면에 배치한 키 큰 네 개의 기둥 모양 교문은 상당히 권위적이다.
1906년 5월 마산포 성호리 교회당[현 문창 교회]에 독서숙이 설치되었는데 이것이 사립 창신 학교의 전신이다. ‘창신’이라는 이름은 1908년 9월부터 사용하였지만 「사립 학교령」에 의해 정규 학교의 인가를 받은 것은 1909년 8월 19일로, 남녀공학이었다. 개교 후부터 1912년 5월까지 마산포 교회 예배당 건물을 창신 학교 초등과 교사로 사용했다. 창신 학교 다음으로 설립된 사립학교는 성지 학교로, 이 학교는 현 성지 여자 중고등학교의 전신으로 1910년 10월 24일 외서면 완월리에서 문을 열었다.
개항과 함께 일본의 불교도 마산에 침투하여 교세를 확장해 나갔다. 1902년에 정토종 포교소가 설치되면서 1903년 3월 서본 원사 출장소, 1908년 8월 진언종 풍산파 마산 포교소, 1909년 3월 일련종, 1909년 8월 조동종 포교소, 1910년 4월 천리교 마산 포교소 등 일본 사찰이 속속 들어왔다. 이들은 주로 일본인을 상대로 포교 활동을 하면서 마산의 불교 신도들에게도 포교 활동을 했다. 이들 일본 불교의 침투와 함께 일본계 불교 건축들이 지어졌을 것으로 보이나 대부분 훼손 또는 철거되고 남아 있지 않다.
일본 불교와 함께 신사(神社)도 건축되었다. 1876년 강화도조약이 체결된 후 개항장에 각국 공동 조계지가 설치되면서 일본 거류민들은 조계지에 신사를 지었다. 마산의 일본 신사(神社) 건립 계획은 1909년 초 홍청삼(弘淸三)에 의해 주도되었다. 당시 마산 이사관이던 삼증(三增)이 해관장의 사택 예정지지[현 제일 여고 교정]를 신사 부지로 내놓았는데, 도시 공간적 측면에서 볼 때 가장 위계가 높은 자리였다. 마산 신사에는 천조대신(天照大神)을 봉안한 본전 외에 술 만드는 신 주호신(酒護神)을 모신 송미 신사(松尾神社)도 있었다. 송미 신사는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고 1936년에 증설한 것이다. 지금도 제일 여고 주변에는 당시의 신사 흔적이 남아있다. 교문 안과 바깥 돌계단이 옛 신사 입구 계단이다.
일본 군대가 마산에 진출한 시기는 마산선 철도가 건설되던 1905년 경 이었다. 본격적인 진출은 1909년 7월 일본 육군의 중포병 대대(重砲兵大隊)가 진해에서 마산 월영동[현 월영동 아파트 단지]로 이전하고, 1909년 12월 대구 헌병 분견소(大邱憲兵分遺所)가 신마산에 설립되면서 부터이다. 1908년부터 병영 건설에 착수하여 1909년 7월 완공되었고, ‘진해만 요새 사령부’와 ‘진해만 중포병 대대’가 이곳으로 옮겨왔다. 그 후 1913년 '진해만 요새 사령부'는 진해 좌천리로 이전해 가고 중포병 대대는 해방 때까지 이곳에 주둔했다.
창원시 마산합포구 월남3가(月南三街)에는 1926년에 붉은 벽돌로 지은 옛 마산 헌병 분견대[등록문화재 제198호] 건물이 남아있다. 기와 지붕이며 벽면 전체에 돌림띠를 둘러 장식하고 수직의 긴 창을 반복적으로 배치한 모습이다. 진해에는 1912년에 지은 옛 진해 방비대 사령부(舊 鎭海防備隊 司令部)[등록 문화재 제195호] 건물과 진해 방비대 사령부 별관[등록 문화재 제196호] 및 1914년에 지은 옛 일본군 진해 요항부 사령부(舊 鎭海要港部 司令部)[등록 문화재 제194호], 구 진해 요항부 병원(舊 鎭海要港部 病院)[등록 문화재 제197호], 구 진해 해군 통제부 병원장 사택(舊 鎭海海軍統制府 病院長 舍宅)[등록 문화재 제193호] 등이 남아 있다.
1912년에 지은 옛 진해 방비대 사령부 건물은 좌우 대칭형 평면으로 정면 중앙부에 현관 포치(porch)가 돌출되어 있고, 그 위쪽에 사각 기둥 형태의 필라스터(pilaster)를 세워 정면성을 강조한 형태이다. 붉은 벽돌과 함께 정교하게 가공된 흰색의 화강석을 사용하여 화려하게 장식하였고, 전체적으로 위엄 있는 입면이 특징이다.
1914년에 지은 옛 일본군 진해 요항부 사령부는 정면 중앙부에 2층 높이의 현관 포치(porch)가 돌출되어 있고, 그 위쪽에 사각 기둥 형태의 필라스터(pilaster)를 세우고 삼각형의 페디먼트(pediment)를 올려 정면성을 강조한 형태이다.
일제 강점기 일본 해군의 병원장이 살던 진해 해군 통제부 병원장 사택은 ‘ㄱ’자형의 평면에 주 현관이 돌출형으로 설치되어 있으며, 내부에서 손님을 접대하는 응접 공간은 양식으로, 가족들의 주거 공간은 전통적인 일식으로 되어 있는 목조 주택이다.
그 밖에도 많은 상업, 주거, 공공, 공업 건축 등이 있었으나 도시 개발과 건물의 노후로 인해 보존되지 못하고 대부분 철거되었다. 다만 창원 지역의 근대 건축 중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는 것은 문화재로 지정 보호하고 있다.
[현대 건축]
1974년 이후 산업 단지가 조성되고, 이어 경상남도 도청이 이전된 후 창원 지역에는 도시 규모에 걸맞는 특색 있는 현대 건축이 지어졌다. 특징적인 현대 건축으로 늘푸른 전당·성산 아트홀·창원 컨벤션 센터(CECO)·더시티7 등이 있다. 1993년 건축된 반송동에 있는 지하 1층 지상 4층[연면적 5,497㎡] 규모의 창원 시립 도서관은 청소년들의 꿈과 미래를 열어가는 어울림 광장으로 건축한 것이다.
한국 대표적인 현대 건축가 김수근이 1977년에 설계한 마산 양덕 성당은 마산의 주교좌성당이다. 이 성당은 한국의 문화와 풍속에 대해 깊은 이해를 가진 한 오스트리아 신부에 의해 시작되었다. 기단, 벽체, 지붕의 고전적 형태 요소를 가지나 그 형식은 불규칙하다. 적절한 크기로 분화된 평면도 부정형의 공간을 구성하고 있으나, 제대를 중심으로 관통하는 축에 의하여 강력한 평형을 유지하고 있다. 완만한 경사로를 타면서 시작되는 동선은 세속과 경건의 영역을 넘나들면서 때로는 종교적 긴장과, 때로는 종교적 축제를 경험하게 한다. 종교가 지닌 보편타당한 속성에서 보면 신자는 그들의 유일하기를 바라며 그들의 공동체가 명확한 아이덴티티를 공유하기를 원한다.
양덕성당은 이 같은 종교적 속성을 건축을 통해 구현한 것이라 하겠다. 기능의 해석에서 출발한 형태 표현은 성당이 놓이는 지역과 건축 당시의 독특한 종교성과 시간성을 고민하며 반영한 결과로 이를 통해 다른 성당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형태를 구현하고 있다.
1997년 건축된 삼동동의 늘푸른 전당은 지하 2층 지상 3층 규모[연면적이 1만 1993㎡]로 전시, 공연, 교육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다. 2000년 건축된 용호동의 성산 아트홀은 시민들의 문화, 휴식 공간으로서 사용하기 위해 지은 것이다. 지하 2층 지상 3층의 규모[연면적 1만 ,472㎡]의 이 건물에는 1,720석 규모의 공연장과 최첨단 시설을 보유한 대극장, 스타디움 형식의 무대, 510석 규모의 소극장이 있다.
마산회원구 호계리에 있는 천주교 창원 호계 성당은 김정한이 설계한 성당 건축이다. 1998년에 지었으며, 건축 규모는 대지면적 1,621㎡, 건축면적 584.21㎡[연면적 1,490.89㎡]이다. 호계 성당은 단순한 종교적 기능 외에 지역 주민들의 커뮤니티 공간으로도 사용할 수 있도록 앞쪽에 넓은 마당 두고 건물을 대지의 끝으로 배치했다. 연못 속에 자리 잡은 계단 탑은 주변을 끌어들이는 주요한 공간으로 상부의 종탑과 같은 형상을 하고 있고, 양쪽의 벽면은 십자가 형태로 벽을 뚫어 조소적인 성격을 부여했다.
돌출된 계단실은 전체 형태에서 균형감을 유지하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신자들을 2층으로 유도하기 위한 경사로를 두어 동선을 자유롭고 경쾌하게 처리했다. 2층의 본당 내부의 콘크리트 면은 그대로 드러나 있으며, 치장하지 않은 콘크리트 면이 주는 정직함과 순수함은 본당의 내부를 종교적 공간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내측 벽면에는 음향을 고려하여 부분적으로 드라이비트와 흡음 벽돌을 사용하였을 뿐이다. 제대의 천장에서 떨어지는 빛은 전통 한지를 이용한 유리창을 통해 아래로 확산되면서 은은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2004년 3월에 지은 경남 도립 미술관은 지하 1층 지상 4층 규모의 전용 미술관으로, 다목적 홀, 대·중·소 전시장, 자료실, 사무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도시의 맥락을 고려한 배치와 간결하면서 섬세한 외관 구성, 변화 있는 좁고 긴 경사로 등이 건축적 특징이다.
2005년 9월 창원 컨벤션 센터(CECO)는 국제 도시 창원의 위상에 맞게 대규모 전시 및 국제 회의 전문 시설로 지은 것이다. 6층 규모[연면적 41,233㎡]의 이 건물은 옥내외 전시장과 대회의실, 중소회의실, 컨벤션홀, 중소기업 지원 센터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터빈 모양의 건물 외관은 기계 산업 도시 창원의 이미지를 현대적 감각으로 형상화한 것이며, 곡선적인 지붕은 한국의 전통미를 표현한 것이다. 이밖에 연계 시설로 지상 15층 지하 3층 규모의 특급 호텔과 쇼핑·엔터테인먼트 몰, 교육 문화 시설, 트레이드 센터, 오피스텔 등을 건립하여 원스톱 서비스가 이루어지도록 계획했다.
2005년에 착공한 두대동의 더시티7은 생활·문화·업무 기반 시설이 구비된 복합 단지이다. 43층 2개동, 32층 2개동 등 총 4개동 1,060가구의 오피스텔을 배후 단지로 쇼핑몰 3개동과 특급 시티세븐 풀만 호텔, 트레이드 센터, 교육 문화 센터로 이루어져 있다. 더시티7은 원스톱 리빙이 가능한 도시 속의 작은 도시로 미래형 도시 개발 모델이라는데 큰 의미가 있다.
이처럼 창원시에는 우수한 전통 건축과 근대 건축이 타 지역에 비해 적은 반면 1970년 이후 산업과 행정 중심 도시로 급격히 발전하면서 지은 수준 높은 공공 건축, 문화 공연 시설 등이 계획적으로 건축되면서 도시 미관 및 시민의 삶의 질도 크게 향상되었다.
[의의와 평가]
창원 건축의 새로운 경향은 1990년대 이후에 나타났다. 당시 한국 현대 건축에 나타난 대중성, 상징, 은유, 복합성, 변화 있는 공간 구성, 추상적인 형태는 창원의 현대 건축에도 영향을 주었다. 2004년에 준공된 경남 도립 미술관은 이러한 경향을 잘 반영한 작품이며, 창원 컨벤션 센터와 더시티7은 2000년대 이후 건물의 대형화·고층화 현상을 반영하고 있다. 이들 건물의 독특한 형태와 세밀한 세부 처리 등은 구조 기술과 재료의 발달을 기인하며, 잠차 국제 수준의 건물들이 들어서면서 창원의 건축 양상은 더욱 다채로워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