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20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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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九山禪門-鳳林寺 |
영어의미역 | Nine Mountains School of Zon and Bongrimsa Temple |
분야 | 종교/불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
집필자 | 배상현 |
[개설]
경상남도 창원시에 있는 봉림산 봉림사(鳳林寺)는 신라 말 구산선문(九山禪門) 가운데 하나였던 봉림산문의 중심 사찰이었다. 봉림사가 있던 자리에는 1919년 조선총독부가 주요 유물들을 강제로 옮겨간 표석이 남아 있다. 현장을 떠나 있는 유물들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관리하고 있는데, 신라 말 창원의 역사와 문화를 들려주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봉림산문(鳳林山門)의 중심지로 신라 하대 창원의 역사를 간직한 봉림사에 관한 특별한 이야기를 들어보자.
[봉림사 옛터에 오르다]
창원의 봉림산에는 봉림사의 옛터가 있다. 이 터는 1995~1998년 4차례에 걸쳐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에 의해 발굴 조사가 되었다. 이를 통해 금당(金堂) 터와 탑 자리가 확인되는 등 일부 가람의 구조를 알 수 있었다. 사역(寺域)의 중심부에는 동서 16m 남북 14m의 타원형 못이 조성되어 있고, 그 가운데 수미산(須彌山)으로 여겨지는 조산(造山)도 확인되었다. 건물지에서는 ‘봉림사(鳳林寺)’라 새긴 기와 조각들이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수습되었다.
절 터를 둘러보다 보면 건물의 기단석 같은 것이 노출되어 있고, 누군가 올려놓은 와편들도 볼 수 있다. 북측 모퉁이 즈음에는 돌로 만든 작은 기둥 하나가 서 있다. ‘대정 8년 12월 조선총독부(大正 八年 十二月 朝鮮總督府)’라 새겨진 글씨가 선명하다. 3·1운동이 일어난 해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해인 1919년에 조선총독부에서 세웠다는 표석이다. 신라 말 이곳에 머물렀던 고승 진경대사(眞鏡大師) 심희(審希)의 탑을 1919년에 이곳에서 옮겨간 사실을 일러주는 표석이다.
마치 깊은 산속에 들어와 있는 느낌을 주는 봉림사 옛터에서 밖으로 나오면, 봉림사가 위치했던 곳이 그리 궁벽한 곳이 아니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교통이 용이한 사통팔달(四通八達)의 입지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절 앞으로는 부처고개라 불리는 지름길이 나 있고, 어귀에는 길손을 맞이하는 마애불이 서 있다. 고개를 넘으면 여러 육로와 연결된다. 반대로 개울을 따라 산길을 내려오면 창원분지 안에 이르른다. 이전에는 바다가 깊숙이 들어와 쉽게 포구와 연결되었던 위치이다. 오늘의 지귀상가 근처가 이전에 지이포(只耳浦)가 자리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곳은 남해안의 해상로와 쉽게 연결되었던 곳인 것이다.
[구산선문 봉림사가 성립된 까닭은]
봉림사는 신라 말의 역사를 간직한 대표적 사찰로, 흔히 사람들은 구산선문의 하나로 꼽고 있다. 선종은 경전과 이론을 중요시 하는 교종과 달리 ‘불립문자(不立文字)’·‘견성오도(見性悟道)’를 표방하면서 스스로의 깨달음을 강조하는 신행으로 신라 말 6두품과 지방 호족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각 지방에서 성행한 선종의 산문 가운데 아홉 군데를 일컬어 구산선문이라 한다.
구산산문의 등장은 신라 하대에 깨어있는 지식인들의 동향을 웅변하고 있다. 당시까지 위세를 떨치고 있던 교학 불교는 절대 왕권과 골품 귀족들의 기득권을 옹호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배층에서는 왕위 계승을 둘러싼 분란이 끊이지 않고 아래로는 농민들의 궁핍이 가중되고 있어도, 이를 구제할 방도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 시기 선종 산문의 등장은 바로 이들이 딛고 서 있던 구체제에 대한 비판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선종의 산문은 대개 영향력이 있는 고승과 그가 머무는 사찰을 중심으로 성립하였다. 가지산문은 장흥의 보림사(寶林寺)를, 실상산문은 남원의 실상사(實相寺)를, 동리산문은 곡성의 태안사(泰安寺)를, 사자산문은 영월의 흥녕사(興寧寺)를, 사굴산문은 강릉의 굴산사(掘山寺)를, 성주산문은 보령의 성주사(聖住寺)를, 희양산문은 문경의 봉암사(鳳巖寺)를, 수미산문은 해주의 광조사(廣照寺)를 중심 사원으로 하였다. 가장 남쪽에 자리한 봉림산문은 창원의 봉림사가 그 중심이었다.
봉림사의 창건은 진성여왕 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시기는 유난히도 자연재해가 많아 농민들의 생계가 어려웠는데도 중앙 정부는 조세(租稅)·공부(貢賦)·역역(力役)의 부담을 더욱 과중하게 하고 있었다. 자연재해와 세금 부담에 신음하던 농민들은 결국 벌떼처럼 들고 일어났다. 신라 하대 사회는 왕의 실정이 컸다고는 하지만 골품제의 모순이 고질화되어 있었고, 국가의 만성적인 재정난까지 겹쳐 있어 미래에 대한 전망이 어두웠다. 지방에서는 농민들과 함께 지식인과 재지 유력가들이 꿈틀대고 있었다. 대외적으로 적극 열려 있고 사회 변화에 민감하였던 창원 지역도 예외는 아니었다.
[넋이 담긴 기념물]
봉림사의 역사는 진경대사로 유명한 심희의 행적과 더불어 찾을 수 있다. 앞서 본 조선총독부가 세운 표석은 그때까지 절 터에 있던 심희의 기념물을 옮겨갔다는 증표이다.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관 관리하고 있는 중요 유물로, 이른바 진경대사 보월능공탑(眞鏡大師 寶月凌空塔)과 탑비(塔碑)가 그것이다. 앞의 것이 유골을 안치한 몸이라면, 탑비는 그의 생애를 담고 있는 블랙박스이다.
진경대사 보월능공탑은 통일신라 양식의 팔각원당형 부도이다. 팔각의 바닥돌 위에 전체적으로 팔각형의 틀을 유지하면서 만들어졌다. 받침돌에는 안상을 새겼는데 위쪽에 불꽃처럼 솟아 있는 삼산(三山)의 문양이 있다. 가운데 받침돌은 공을 눌러 놓은 듯한 북 모양인데, 가운데에 여덟 개의 꽃송이를 새기고 옆으로 띠 장식으로 연결하였다. 그 윗단의 돌은 연꽃 여덟 송이를 꽃부리가 위로 향하게 새겼다. 탑신은 별다른 장식이 없고 다만 모서리들은 기둥 모양으로 처리되었다. 팔각으로 된 지붕돌은 굵은 선을 처마 끝까지 내리고 끝은 꽃 장식으로 마감하였다. 지붕돌 마루 끝의 암막새는 윗부분이 결락되었는데, 탑의 꼭대기는 연꽃 봉우리 모양으로 마감하였다.
이 탑은 진경대사가 입적하자 경명왕이 영회법사(榮會法師)를 보내어 조문하고, 다시 삼칠일이 되자 사자를 보내어 부의(賻儀)와 함께 진경대사라는 시호와 탑호를 내리면서 조성된 기념물이다. 실제 진경대사 보월능공탑이 조성된 시점은 진경대사가 입적한 이듬해인 924년(경애왕 1) 경으로 추정된다.
[역사를 담은 블랙박스]
진경대사 보월능공탑 옆에는 탑비가 있었다. 정식 이름이 진경대사 보월능공탑비(眞鏡大師寶月凌空塔碑)이다. 그 형태는 거북 받침돌 위로 비의 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올렸다. 받침돌의 거북머리는 유난히 크고 입에는 여의주를 물었는데 머리 위로는 뿔이 있던 작은 구멍이 보인다. 등 위로는 비를 꽂아두기 위한 네모난 홈을 마련하였는데, 주위에 구름무늬로 가득 차 있다.
현재 비문이 새겨진 몸돌의 하단은 일부 손상이 되어 옛 탁본을 통하여 복원된 상태이다. 머릿돌에는 구름 속에 둘러싸인 두 마리 용이 모퉁이에 각각 한 마리씩 표현되어 있다. 현재의 비 상태로는 전체 내용을 판독하는 데 어려움이 있으나, 그 전문이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에 실려 있어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
비문에 의하면 심희는 김해에서 태어나 아홉 살에 원감(圓鑒) 현욱(玄昱)에게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현욱은 중국에 유학하여 돌아온 뒤 선승으로는 가장 먼저 국사(國師)에 봉해진 인물이었다. 심희는 출가 십년 만에 현욱의 심인(心印)을 전수받았다. 868년(경문왕 8)의 일이다. 이 후 심희는 전국을 두루 돌면서 수행과 교화를 펼쳤다. 찬유(璨幽)와 같은 제자승(弟子僧)을 대동하여 그가 돌아본 곳은 광주, 설악, 명주 등지였는데, 당시 반신라(反新羅)의 정서가 팽배한 곳이 많아 눈길을 끈다.
심희가 머무는 곳에는 많은 선승들이 모여 들었고 지역의 민심에도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비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송계(松溪)에서 선(禪)을 행하니 배우는 사람들이 비가 오듯 모였고, 잠시 설악(雪岳)에 머무니 선객(禪客)들이 바람처럼 달려왔다. 어디를 가더라도 숨지 못하니 어찌 그 뿐이겠는가. (중략) 명주(溟州)에 가서 발을 멈추고 산사에 가서 쉬니, 주변 천리가 또 편안하였고 한 지방이 변화하였다.”
[지역 사회가 후원하다]
심희가 창원에 이르게 되는 것은 20여 년 동안의 순례 행을 마친 이후의 일이다. 그렇다면 심희가 창원으로 와서 머물게 된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다시 비문을 보자. “얼마 후 김해의 서쪽에 복림(福林)이 있다는 말을 멀리서 듣고, 갑자기 이 산을 떠나 남쪽으로 가겠다고 말하였다. (중략) 진례성제군사(進禮城諸軍事) 김율희(金律熙)가 도를 사모하는 정이 깊어 소문을 듣고 뜻을 간절하여 경계 밖에서 기다리다가 성안으로 맞아 들였다. 그리고 절을 고쳐 주며 법의 수레가 머물도록 청하였다. (중략) 이보다 앞서 지김해부진례성제군사(知金海府進禮城諸軍事) 명의장군(明義將軍) 김인광(金仁匡)이 가정에서는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고, 임금에게는 충성을 다하였으며 선문(禪門)에 귀의하여 절을 고치는 것을 도왔다.”
심희는 그의 출신지가 창원과 가까웠고, 무엇보다 ‘복림’이라 불리는 길지(吉地)를 찾아온 것이었다. 또 여기에는 그를 후원하는 재지 유력의 인사들이 있었다. 이들은 모두 당시 창원·김해 지역의 호족이었다. 반대로 그들이 심희를 후원하였다는 사실은 그만큼 봉림사가 중요한 위치에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신라 왕실이 귀의하다]
심희가 봉림사에 주석하는 동안 신라 왕실에서도 각별한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특히 효공왕(孝恭王)~경명왕(景明王)에 이르는 시기에는 그 정도가 더 하였고, 마침내 심희는 왕성을 다녀오기도 하였다. 비문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효공왕이 특별히 정법대사(正法大德) 여환(如奐)을 보내어 윤음(綸音)을 내려 멀리서 법력을 빌었으며 조서를 내림과 아울러 발우를 보내고, 특사를 통해 믿음을 토로하게 하였다. (중략) 대사가 사람들에게 ‘비록 깊은 산 속에 있더라도 왕의 땅에 사는 것이다. 더구나 부촉도 있으니 왕의 신하로서 거절하기 어렵다’라 말하고 918년(경명왕 2) 겨울 10월에 훌쩍 절을 떠나 왕성에 이르렀다. (중략) 곧바로 법상에 올라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편안히 하는 방법’을 설하였다.”
[산문의 중심이 되다]
신라 왕이 이렇게 심희의 법력을 구하고 심희는 직접 경주로 가서 나라를 구제할 방안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이로 보아, 당시 심희는 국사에 버금가는 우대를 받았을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심희는 봉림사를 중심으로 하나의 산문(山門)을 이루게 되었다. 그런데 이 산문은 다른 구산선문과는 달리 혜목산 고달사에서 현욱(玄昱)으로부터 인가를 받은 심희가 창원의 봉림사를 중심으로 선풍(禪風)을 드날린 것이 특징이었다. 그래서 이곳 출신의 제자들은 ‘봉림가자(鳳林家子)’, ‘봉림대사(鳳林大師)’ 등으로 불리었고, 산문의 이름 또한 봉림산문으로 불리게 되었던 것이다.
구산선문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봉림산문이 창원 지역을 중심으로 부상하였음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당시 창원 지역 주변은 여러 선승들이 머물면서 크고 작은 사암(寺庵)이 생기기도 하고 폐사되기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봉림사를 후원한 김율희는 아버지 김소충(金蘇忠) 대에 이미 선종을 후원하여 이 지역을 선승들의 요람으로 만들려고 하였던 듯하다. 심희 이외에도 사굴산파로 알려진 행적(行寂), 수미산파로 알려진 이엄(利嚴) 및 충담(忠湛) 등도 후원을 받았다. 봉림산문은 이처럼 불교문화가 이미 널리 퍼져있던 곳에서 성립했던 것이다.
[살림살이와 수행은 어떠했을까]
봉림사는 많은 후원자들의 지원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우선 지역의 재지 세력으로부터 적극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다. 앞서 언급된 김인광이나 김율희가 대표적이었다. 뿐만 아니라 봉림사의 후원자들 중에는 신라 왕실도 있었다. 이는 효공왕의 적극적인 구애로도 나타난 바 있지만, 918년(경명왕 2) 봉림사 주석 승려가 왕궁을 출입할 정도였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봉림사는 주변의 적도(賊徒)들을 소탕하는데도 앞장 서는 등 한층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 주었다. 이러한 모습들은 재정적으로도 신라 왕실의 지원을 받고 있었음을 시사해주는 대목이다.
이러한 가운데 봉림사는 사세(寺勢)를 더욱 넓힐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 말 봉림사에는 많은 선승들이 운집하여 그 숫자가 한 때 5백 인에 가까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급작스럽게 사세를 확장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자칫 사원 상호간 분쟁의 소지가 될 수 있고 지역 농민들과도 이해와도 상충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 곳에 경제력이 집중되고 그것이 농민들과 이해관계를 달리할 경우, 그들로부터 공격을 받기도 하였다. 개청(開淸)과 행적(行寂)이 굴산사(掘山寺)에 머무는 동안 농민군의 공격을 여러 차례 받은 바 있고, 해인사(海印寺)의 경우에는 농민들과의 충돌로 50여 명의 승려들이 목숨을 잃기도 하였다. 후대의 일이지만 인근에 있던 왕후사(王后寺)는 장유사(長遊寺)와의 분쟁으로 혁파되었다.
그렇다면 당시 봉림사는 그 살림을 어떻게 꾸리고 있었을까? 나름의 체계가 있었을 것으로 추론해 볼 수 있다. 삼강체제(三剛體制)가 그것이다. 이는 심희의 제자인 찬유의 고달사(高達寺) 삼강전(三剛典)에서 시사를 받을 수 있다. 여기에는 사원에서 대중을 통솔 유지하는 조직이 원주승(院主僧)과 전좌승(典座僧), 그리고 유나승(維那僧), 직세승(直歲僧)의 체계로 나타난다. 이 가운데 직세승은 선문의 경제적 기반이었던 토지와 경작 농민들을 상대로 세를 거두어 들이는 역할을 담당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봉림사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편, 당시 선문의 분위기를 감안해 볼 때 소속 승려들은 좌선(坐禪)을 통한 수행만을 고집하지 않고, 직접 생산 활동에도 임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이미 당(唐)에서는 회해(懷海)의 청규가 불문율로 퍼져 있었는데,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말라(一日不作 一日不食)’라는 규칙이 신라에도 널리 퍼져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분위기가 일반적 형태였다면 봉림사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