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20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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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古代-海上王國-骨浦國 |
영어의미역 | Sea Kingdom of Ancient Times, Golpo Country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
시대 | 고대/삼국 시대/가야 |
집필자 | 남재우 |
[개설]
삼한 시기의 변한 지역에는 『삼국지』에 보이는 ‘국(國)’만 존재한 것은 아니었다. 변한 제국(諸國) 외에도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다양한 정치 집단들이 나타나고 있다. 변한 지역에는 포상팔국(浦上八國)이 있었다. 포상팔국 중에서 위치 비정이 가능한 곳이 사물국(史勿國)[현 경상남도 사천], 칠포국(柒浦國)[현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면], 골포국(骨浦國)이다. 이 중에서 삼한 시기 창원 지역에 자리 잡고 있었던 포상팔국 중의 한 나라가 골포국이다.
[골포국은 바닷가에 자리 잡은 해상왕국이었다]
골포국이 있었다고 추정되는 창원분지 지역은 태백산맥·소백산맥으로 둘러싸인 대침식 분지의 최남단에 위치하는데, 서쪽의 서촌·봉암 일대는 좁은 범위이지만 내륙으로 깊이 들어온 진해만과 접해 있다. 분지의 외곽으로는 남쪽에 장복산[582.2m], 서쪽에 반룡산[팔룡산, 327.7m], 동쪽에 불모산[801.7m], 북쪽에 봉림산과 정병산[566.7m] 등으로 둘러싸여 긴 타원형의 분지를 이루고 있다.
불모산에서 발원한 남천은 북서쪽으로 흘러들어 토월천·가음정천·대방천·안민천의 지류들과 합류하여 마산만으로 유입되며, 북쪽의 천주산[638.8m]에서 발원한 내동천은 남동쪽으로 흘러내려 소계천·창원천·용지천 등과 합류하여 마산만으로 흘러들고 있다. 지질학적으로 경상계 지형이어서 노년기 초기의 구릉성 산지로 구성되어 있어 사암의 유실이 심하고 하구에 퇴적되어 범람이 잦아 비교적 넓은 갯벌을 형성하며, 창원분지 내에 100m 이내의 저구릉지가 곳곳에 분포되어 있어 옛날부터 사람들이 정착하여 살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따라서 창원분지 내 작은 구릉의 정상부와 언저리 경사면에는 조개더미 및 고분 유적들이 다수 분포하며, 구릉의 끝과 평지에는 청동기시대 유적들이 다수 분포하고 있다. 창원분지 내 저지에 떡뫼·뒷두대·반송·내동·가음정·용지 등 낮은 구릉지가 산재하여 있다. 또한 높이 20m 이하의 충적평야가 비교적 넓다. 특히 높이 10m 이하의 충적지가 상대적으로 넓다.
[골포국은 철의 왕국이었다]
변한 지역에 자리 잡고 있었던 골포국의 성장 기반은 농업 생산력과 자원 등이었다. 변한은 『삼국지』에 “토지가 비옥하여 오곡 및 벼를 심기에 적합하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농업을 중요한 생산 기반으로 한 사회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창원분지에는 주변 산지로부터 분지 중심부를 향하여 하천이 흘러내리며, 이 하천들이 운반한 퇴적물에 의해 산록부에 선상지가 형성되어 있다. 선상지들은 일찍부터 인간의 활동 공간으로 이용되어 왔다. 선상지의 선정과 선단은 물을 얻기 쉽고 홍수와 같은 자연재해를 피할 수 있으며, 퇴적층으로 된 완만한 경사의 지형 면은 취락지·경지·묘지 등 인간 활동에 필요한 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아마 이런 지형들이 농경지로 활용되었을 것이다.
조선시대의 기록이지만 창원 지역은 “땅이 기름지고 기후는 따뜻하며, [중략] 논이 약간 많다”고 한다. 실제로 가야시대에 해당하는 논 유적이 조사되었다. 가음정동 유적을 관통하여 성산 패총으로 이어지는 도로 구간을 발굴 조사할 때, 구릉 아래의 논으로 경작되던 저지대에서 6세기 대에 해당하는 수전(水田)이 조사되었다. 발굴 지역은 협소하지만 논바닥, 둑, 배수로 시설, 사람과 소의 발자국 등이 확인되었다.
반계동에서도 논 유적이 조사되었다. 반계동은 선상지 지형인데 반계동의 선상지는 배후 산지가 화강암으로 되어 있어 토양 중에 역(礫)[입자 지름이 2㎜ 이상이 되는 암석 파편]이 매우 적게 포함되어 있으므로 경지를 만드는데 크게 유리했다고 한다. 특히 습지가 있어 야생 벼가 일찍부터 분포하였을 가능성도 크다는 조사 보고가 있었다. 지형 분석을 통하여 볼 때 창원분지 지역에서 농업이 가능했던 지역은 저지대[저위면]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농업용 도구의 발견도 농업 생산력을 추정해 볼 수 있는 근거이다. 2세기 중엽부터 4세기에 걸쳐 조성된 도계동 고분군에서 철낫 5점이 출토되었으며, 2세기 중반에서 3세기 말에 걸쳐 조성된 삼동동 고분군에서는 경작 도구로 생각되는 쇠괭이 7점, 수확 용구로 생각되는 철낫 4점과 철도자 9점이 조사되기도 했다.
골포국이 성장할 수 있었던 조건 중에 자원도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나라에서는 철이 생산되어 한(韓)·예(濊)·왜(倭)가 모두 와서 사 간다. 시장에서의 모든 매매는 철로 이루어지는데 마치 중국에서 돈을 쓰는 것과 같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철은 변한 발전의 대표적인 자원임을 알 수 있다. 창원 지역에서도 철이 생산되고 있었음은 성산 패총 유적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철을 제련, 생산하는 야철지가 조사되었다. 이것은 후대의 기록이지만 불모산에서 철이 생산되었다는 기록으로 방증할 수 있다.
골포국은 마산만에 접해 있었기 때문에 수산 자원도 당시 사람들에게 중요한 자원이었을 것이다. 당시의 수산 자원은 창원분지 지역에 널리 분포되어 있는 조개더미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창원분지 내에는 성산 패총을 비롯하여 소답동 조개더미·남산 조개더미·가음정동 조개더미·내동 패총·외동 조개더미 등이 있었다. 발굴 조사된 성산 패총을 통하여 당시의 수산 자원을 검토해 볼 수 있다. 어류로는 참돔·농어·다랑어·새치다래 등이 있는데, 다랑어 등의 존재로 미루어 당시 어업이 연안에만 한정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패류는 굴이 대부분이며, 전복·대합·소라 등이 섞여 있다. 재첩도 발견되는데 성산(城山) 부근이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곳이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골포국은 바닷가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소금도 중요한 자원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조선시대에는 지금의 명서동 일대에 염전 및 염창(鹽倉)이 있었다고 한다. 염창이 있고 염장관(鹽場官)이 감독하고 지켰다는 것은 고대 사회에도 소금이 생산되었을 가능성을 유추할 수 있다.
[골포국은 교역의 중심지였다]
삼한의 제국(諸國)들은 일찍부터 중국 군현이나 인근 나라들과의 교역이 활발했다. 골포국도 마산만을 끼고 있었으므로 교역이 골포국의 성장에 커다란 기여를 했을 것이다. 다음은 골포국이 교역의 중심지였음을 알려 주는 기록들로, 『삼국지』 권 30, 『위서』 30, 「오환선비동이전」에 나온다.
① 왕망의 지황 연간(20~23)에 염사치가 진한의 우거수(右渠帥)였는데 낙랑의 토지가 비옥하여 사람들의 생활이 풍요롭고 안락하다는 소식을 듣고 도망가서 항복하기로 하였다. [중략] 염사치는 호래를 데리고 출발하여 함자현으로 갔다. 함자현에서 낙랑군에 연락하자, 낙랑군은 염사치를 통역으로 삼아 금중으로부터 큰 배를 타고 진한에 들어가서 호래 등을 맞이하여 데려갔다.
함께 항복한 무리 천여 명을 얻었는데 다른 오백 명은 벌써 죽은 뒤였다. 염사치가 이 때 진한에게 따지기를, “너희는 오백 명을 돌려보내라. 만약 그렇지 않으면 낙랑이 만 명의 군사를 파견하여 배를 타고 와서 너희를 공격할 것이다”라고 하니, 진한은 “오백 명은 이미 죽었으니 우리가 마땅히 그에 대한 보상을 치르겠습니다”라 하고는, 진한인 만오천 명과 변한포(牟韓布) 만오천 필을 내놓았다. 염사치는 그것을 거두어 가지고 곧바로 돌아왔다.
② 환제[146~167]·영제[167~189] 말기에는 한(韓)·예(濊)가 강성하여 [한의] 군현이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니, [군현의] 많은 백성들이 한국(韓國)으로 유입되었다. ③ 경초 연간[237~239]에 명제가 몰래 대방태수 유흔과 낙랑태수 선우사를 파견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대방과 낙랑의] 두 군을 평정하였다. 여러 한국(韓國)의 신지에게는 읍군의 인수를 더해주고, 그 다음 사람에게는 읍장을 주었다.
④ [한의] 풍속은 의책 입기를 좋아하여 하호들도 군에 가서 조알할 적에는 모두 의책을 빌려 입으며, (대방군에서 준) 인수를 차고 의책을 착용하는 사람이 천여 명이나 된다. ⑤ [변진의] 나라에서는 철이 생산되는데 한(韓)·예(濊)·왜(倭) 사람들이 모두 와서 사 간다. ⑥ 왜와 가까운 지역이므로 남녀가 문신을 하기도 한다.
이상의 자료는 삼한 사회의 대외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삼한의 제국(諸國)은 일찍부터 제국(帝國)을 형성한 중국이나, 보다 진화되고 복합적인 한(漢)의 군현이었던 낙랑·대방과 고구려와의 관련 속에서 발전한 2차 국가였다. 제국(諸國)들은 중국의 선진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정치 집단의 발전을 가져왔을 것이다. 이와 같은 선진 지역과의 교류를 보여주는 것이 위의 사료이다.
사료①은 염사치가 진한의 우거수였으므로 진한과 낙랑과의 교섭 기사로 이해할 수 있으나 “변한포 만오천 필을 내놓았다”라는 것으로 보아 변한과의 교류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한 군현과 진한·변한의 교역 사실을 보여 주는 중요한 기록이다. 염사가 지역 명이라면 어느 곳에 해당하는지는 교역의 주도권과 관련하여 중요한 문제이다. 따라서 이에 대해 다양한 입장이 있어 왔는데, 김해, 창원, 충청남도 아산 등으로 비정되고 있다.
일단 염사라는 지역은 진한·변한 지역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진한 우거수’라는 표현으로 보아 진한이든 변한이든 염사치는 진한·변한의 거수였음에 틀림없다. 염사치가 진한으로 돌아올 때 큰 배를 타고 들어왔다는 것으로 보아 해안 지역으로 보아야 하겠다. 이러한 정치 집단으로는 진한의 사로국이나 변한의 구야국 등이 여기에 해당될 것이다. 창원 지역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창원분지 내의 성산 패총에서 오수전 등이 조사되었기 때문이다.
염사가 창원분지 지역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변한포가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변한과 낙랑의 교역의 실체를 파악할 수는 있을 것이다. 또한 교역의 지리적 특성과 철 자원이 김해 지역만이 아니라 경상남도 남해안 일대도 공유하고 있었다는 주장을 고려할 때, 창원 지역에 염사와 비슷한 이름의 ‘염산(廉山)’이란 지명이 있었으므로 염사 지역이 창원 지역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사료①은 변한이 1세기 초에 낙랑과의 교역을 통해 발전하고 있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군현의 많은 백성들이 한(韓)으로 유입되었다든지[사료②], 대방과 한(韓)과의 관계나[사료③], 대방에서 준 의책을 착용한 사람이 천여 명이나 되었다는[사료④] 것으로 보아 낙랑·대방과의 교류가 활발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사료⑤는 변한 제국이 철을 매개로 하여 한(韓)의 제국(諸國)과 예(濊)·왜(倭)와 교역하고 있음을 전해 주는 뚜렷한 증거이다. 사료⑥은 왜와의 교류 가능성을 보여 주고 있다. 따라서 창원분지 지역도 마산만을 통하여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고 교역도 이루어졌을 것이다.
이와 같은 교류의 사실은 이 지역에서 조사된 유물·유적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중국계 유물로는 삼동동 유적에서 출토된 유리제 장신구, 방제경[내행화문경: 후한 초의 내행화문경을 조형으로 하고 낙랑과 일본에서도 발견되었다. 3세기 전반으로 추정된다], 창원 성산 패총에서 출토된 오수전이 있다. 왜계 유물로는 창원 성산 패총에서 출토된 미생토기·토사기(土師器)[2세기말~4세기], 창원 도계동 유적에서 출토된 철사(鐵鉈)[2세기 말], 창원 삼동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청동 화살촉 2점이 있다.
위의 사실로 보아 창원·마산 지역은 기원을 전후로 한 시기부터 낙동강, 남해안과 같은 교통로를 통하여 중국의 군현이나 왜와 교역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수입품은 주로 한경(漢鏡), 유리제 장신구 등과 같은 신분과 부를 상징하는 물건이며, 수출품은 사료①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철·포·생구(生口) 등이었을 것이다.
[골포국에서 탁순국으로]
포상팔국은 김해 지역[혹은 함안 지역], 울산 지역과 두 차례에 걸친 전쟁을 벌였다. 이 전쟁에서 골포국은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해상에 위치해 있던 골포국을 비롯한 포상팔국은 농경지 확보와 교역권의 확보를 위해 전쟁을 벌였지만, 신라의 지원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이 때문에 포상팔국은 더 이상 발전할 수 없었다. 골포국 또한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고, 4세기 이후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가야의 탁순국으로 변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