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51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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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馬山俱樂部 |
이칭/별칭 | 마산 구락부,마산 청년단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양미숙 |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창원 마산 지역에 있었던 사회 단체.
[변천]
1920년 6월에 마산 지역 문화 운동의 구심으로서 마산 구락부가 창립되었다. 마산 구락부는 부르주아 민족주의 운동의 상징이었던 민의소(民議所) 건물을 회관으로 사용하고 민의소 대표였던 손덕우가 초대 회장이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마산 구락부는 교육, 체육, 계몽, 교류 활동에 힘을 쏟았다. 마산 학원과 마산 여자 야학을 설립하여 정규 학교에 가지 못한 아이들을 교육하였다. 조선인 전용의 운동장을 만들고 마산 시민 춘계 체육 대회를 비롯해 갖가지 체육 행사를 주관하였다. 또한, 강연회, 토론회, 웅변대회를 자주 열고 회관 안에 신문 잡지 종람소를 마련하였다. 대외 교류 활동으로는 조선 청년 연합회 가입, 국내외 단체 순회 문화 행사 후원, 창원군을 비롯한 인근 지역의 순회 강연단 파견과 그 지역 청년 단체와의 연합 행사[간친회, 체육 대회, 웅변대회 등]를 개최하였다.
[현황]
마산 구락부가 창립할 때는 부원은 300명 정도였다. 부원들은 다음과 같다. 강석희(姜錫禧)[서기, 상무위원], 구성전(具聖傳), 구인욱(具麟旭)[집행 위원], 김기성(金璣成), 김달순(金達珣), 김명규(金明奎)[회계, 상무위원], 김선집(金善執), 김용선(金容善), 김지철(金知喆)[체육부장, 총무], 김치수(金致洙)[부장, 집행 위원장], 김태권(金兌權), 김형철(金炯轍)[사교부장], 명도석(明道奭)[교풍 부장, 총무], 박인주(朴寅柱)[운동장 기성회 회계], 손덕우(孫德宇)[부장], 손문기(孫汶岐)[서기], 신용식(辛容植)[운동장 기성회 회계]. 신택식(辛澤植)[체육부장], 여병섭(呂炳燮)[여해, 문예부장, 부부장], 옥기환(玉麒煥)[평의장], 이덕진(李德珍)[간사, 상무위원], 이명곤(李命坤)[간사], 이윤재(李允宰)[운동장 기성회 서기], 이주만(李周萬)[문예부장], 이영재(李瑩宰)[교풍부장], 전석(田奭), 황갑주(黃甲周) 등이다.
이들 간부의 상당수는 구마산 어시장 객주를 비롯한 상업 자본가들이었다. 또한, 세대별로 노년부터 청년까지 섞여 있었으며, 친일 행적을 가진 사람과 비밀 결사 운동, 3·1 운동을 이끈 민족주의자가 공존하고 있었다. 이러한 혼잡한 구성으로 창립부터 노년과 청년 사이의 의견이 충돌하였다. 이런 세대 간의 갈등이 사상적 갈등을 담고 있었다. 노·장년층인 조선인 자본가 상층은 친일 경력을 가지고 있었고 ‘문화 운동’을 개량적 틀 속에 집어넣어 운동에서 자신들이 주도권을 가지려 하였다. 그러한 의도는 민족 해방 운동을 지향하는 청년층의 사상 의식과 융화되기 힘들었다.
마산 구락부의 운영 경비는 부원들이 내는 부비보다 옥기환, 구성전, 김치수 등 자본가들의 후원에 크게 의존하였다. 옥기환, 김치수 등이 마산 구락부의 요직을 맡은 것도 이들의 재정 지원 때문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마산 구락부는 이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러한 상황은 청년층의 반발을 사게 되고 몇 차례의 조직 개편을 하게 만들었다. 마산 구락부의 조직은 집행 기구와 의결 기구로 나뉘었는데 의결 기구인 의사회[이후 평의회로 개칭]에는 노·장년층이 다수를 이루었다. 제4회 정기 총회에서 부부장제(副部長制)가 신설되고 부부장에는 민족주의자인 여병섭이 뽑혔다. 창립 때의 실업부, 교육부 등이 없어지고 문예부와 체육부가 핵심 부서로 자리를 잡았다. 제6회 정기 총회에서는 평의회를 없애고, 부장제를 집행 위원제로 바꾸었다. 이는 노·장년 자본가 중심의 조직에서 청년 대중 중심의 조직으로 바꾸려는 의도를 반영한 것이었다. 그러나 청년 대중 조직으로 거듭나지 못하였다.
[의의와 평가]
마산 구락부는 민의소(民議所) 건물을 회관으로 사용하고 민의소 대표였던 손덕우가 초대 회장인 것으로 보아 마산 구락부는 민의소를 계승한 것으로 마산 구락부의 창립은 민의소의 부활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던 청년회 운동의 일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