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5141 |
---|---|
한자 | 馬山娼妓同盟休業 |
이칭/별칭 | 마산 창기 맹휴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이성철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08년 9월 - 기생 단속령, 창기 단속령 발포로 기생 허가제 실시 |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926년 12월 8일 - 경상남도 마산부 만정 복정루 창기들이 동맹 휴업 |
전개 시기/일시 | 1927년 7월 - 경상남도 마산부 수정 일선정 창기들이 동맹 휴업 |
발생|시작 장소 | 복정루 - 경상남도 마산부 |
성격 | 항일 노동 운동 |
관련 인물/단체 | 송복순|야마모토 후데츠기 |
[정의]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 기생집 주인의 학대에 저항한 기생들의 동맹 휴업
[역사적 배경]
일제 강점기의 기생은 식민지라는 통치 제도와 근대 자본주의에 노출됨으로서 새로운 환경에 처하게 된다. 조선 시대까지 예악을 담당하고 사대부가의 여흥을 주도하였던 기생은 신분 해체라는 시대 상황 속에서도 전통 가무악을 전승하는 역할을 수행하지만, 식민지 공창 정책의 대상자였던 창기와 비슷하게 통제되었다. 이처럼 일제에 의해 왜곡되어가는 당시의 기생의 모습은 식민지 권력에 의해 좌우되는 근대 기생의 현주소를 직·간접적으로 보여준다.
조선 시대부터 천한 백성으로 분류되어 독특한 신분 구조를 형성했던 기생들은 1894년 갑오개혁으로 공사 노비제가 폐지되어 외형적으로는 신분 해체에 따른 면천이 이루어지지만 여전히 신분상의 차별을 극복하지 못하였다. 1900년대 초 신문이나 잡지 기사, 총독부의 공식 문건과 풍속 조사 자료집 등에서의 기생에 대한 명명과 분류를 보면 기존 여악(女樂)[궁중의 여기들의 음악 활동]의 일원인 관기가 중심축이 되었던 기생 집단이 갈보, 창기, 또는 매춘부로 항목화되는 양상을 뚜렷하게 발견할 수 있다.
1908년 9월 경시청령 5호 「기생 단속령」과 6호 「창기 단속령」이 발포된 이후, 기생들은 의무적으로 기생 조합 소속원이 되어 경시청으로부터 허가증을 받아야만 기업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허가제를 통해 기생을 조직적으로 제어하고자 하였던 일제는 훈령을 통해서 기생의 행동을 더욱 통제하게 된다. 이러한 제어 구도는 기생을 구습의 일환으로 여겼으며 나아가 문명 진보 즉 개화와 계몽의 방해 요소로 파악했기 때문에, 풍기문란을 일으키는 집단으로까지 이해되었다.
[경과]
1926년 12월 8일 경상남도 마산부 만정에 소재한 일본인인 야마모토 후데츠기[山本筆次]이 경영하는 복정루(福停褸)의 창기였던 송복순은 주인의 학대를 견디다 못해 스스로 자유 폐업을 단행하게 된다. 송복순의 처지에 동감한 약 20여 명의 창기들이 이에 합세하여 동맹 휴업을 하기에 이렀는데, 당시 마산 경찰서에서는 송복순의 배후의 김모 청년이 선동 조종하고 있다며 보고 수사를 했다.
[결과]
수사 결과에 대한 보고 자료는 현재로서 찾기가 힘들다. 다만 창기 송복순과 그의 동료들의 동맹 휴업 이후 1927년 7월 마산에서 다시 창기들의 동맹 휴업이 일어난다. 마산부 수정 일선정(日鮮亭)이란 일본인의 유곽에서 포주의 학대에 견디다 못한 창기들이 동맹 파업을 한 것이다. 그 이유는 ‘포주의 성질이 강폭하고 탐욕이 무상하여 밤마다 놀러오는 손님이 자지 않고 그대로 가기만 하면 수단이 없다는 이유로 구타하는 등의 학대가 자심’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창기들은 일본인 주인이 이곳을 떠나가게 해 달라는 탄원서를 경찰서에 내기에 이른다.
[의의와 평가]
창기들의 강한 단체적 대응 양상은 요릿집이나 권번의 사회적 관례에 깊숙이 개입하여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식민 권력이나 자본 구조에 예속되었던 창기들의 새로운 모습이며, 자신들의 자치권 확보의 진일보한 형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