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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유래와 땅이름들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E010102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의창구 북면 외감리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이정용

외감마을의 오래된 흔적은 1469년에 편찬된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誌)』에 나오는 감계리(甘界里)에서 찾을 수 있다.

당시 감계리(甘界里)는 여러 자연마을을 포함하여 나타낸 마을 이름이었다. 여러 자연마을 중에서 가장 으뜸이었던 감계원[현 외감의 원지동에 있던 옛 마을]에서 이름을 딴 것이 감계리다. 이 감계리가 1789년 편찬된 『호구총수(戶口總數)』에서는 원지리(院旨里)·외감계리(外甘界里)·내감계리(內甘界里)·중방리(中坊里)로 갈라지고, 여기서 나온 외감계리(外甘界里)는 1832년에 편찬된 『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에서 외감리(外甘里)로 바뀌어 오늘에 이른다.

외감(外甘)으로 불렀던 것은 본래 감계리의 여러 자연마을 중에서 제일 바깥쪽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으로 생각된다. 감계리(甘界里)의 ‘甘’은 훈이 ‘달’이고 ‘界’는 ‘밭·벌’의 의미를 지니므로 감계리는 우리말로는 ‘달밭동네’ 또는 ‘달벌동네’가 되는 셈이다. 달밭동네 또는 달벌동네라는 이름이 한자로 표기되면서 감계리(甘界里)가 된 것이다. 외감마을에 달천이 있고, 달천은 감계원(원지동=원지리) 앞을 지나므로 그리 추측할 수 있다.

‘달’은 ‘산’(山)을 뜻하기도 하고 ‘북’(北)을 나타내기도 하는 옛말이다. 그러므로 용지봉천주산, 농암산 등의 높은 산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달밭·달벌동네라 하였을 수 있고, 또한 옛 창원부 치소에서 보면 북쪽에 있는 마을이므로 그래서 달밭·달벌동네라 했을 가능성도 있다. 어느 쪽이 외감이라는 이름과 관련이 있는지 지금에는 헤아리기가 어렵다. 어쨌든 외감(外甘)은 달밭·달벌동네의 바깥쪽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옛 감계원이 있던 지금의 원지동에서 보면 외감은 역시 바깥쪽에 있다.

[마을 이름 이야기]

외감마을에는 역사성과 전설이 깃든 속지명이 있고, 또한 농경과 관련되거나 방위적인 속지명들도 산재해 있다. 마을 남쪽에 있는 돌안은 그곳에 있는 지석묘[3기]의 동남쪽 일원을 일컫는 들이름인데, 지석묘를 기준으로 그 안에 있는 들이라는 뜻으로 생겨난 지명일 것이다.

마을 북동쪽에 있는 은지동은 옛 감계원의 터였으나 지금은 경작지로 변했다. 옛날에 집 기둥을 은으로 만든 부잣집이 있었다 하여 은지동이라 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아마도 조선 시대의 감계원(甘界院)이 있던 원지동(院旨里)을 말할 때 ‘은지동’이 되고 ‘지동’이 ‘기둥’의 방언인 ‘지동’으로 잘못 인식되면서 이러한 전설이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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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산에서 본 외감마을

마을 동쪽 방고(盤谷)에 있는 장승배기는 지금 고속도로 나들목으로 변했다.

장승배기 는 옛 창원도호부에서 옛 칠원과 영산 등으로 가는 길목이었는데, 길목에 세워진 장승 때문에 생겨난 이름이라 하겠다. 이곳 근처에 주막이 있었다 하며, 그 흔적인 듯한 주거지가 방고에 있다. 숩등은 고려 후기 여원 연합군(麗元聯合軍)의 일본 원정 시 군마의 휴식소였다는 구전이 있으나 확인되지 않는다.

용지봉(龍旨峯) 은 우리말 이름인 ‘머리산’을 한자로 쓴 것이다. ‘龍旨’는 ‘머리’를 나타내는 말이다. 즉 고을의 중심(神)으로 삼는 산이라는 뜻으로 생겨난 이름이라 하겠다. 그래서 그곳에서는 예부터 기우제를 지냈다. 농암산은 정상에 농만한 바위가 있어 그렇게 불렀다 한다.

실제로 농보다 더 큰 네모난 바위가 정상에 있는데, 이 때문에 생겨난 이름으로 여겨지나 실은 낭암[낭떠러지와 같은 바위]이 농암으로 변한 것이다. 천주산(天柱山)은 하늘을 떠받치는 기둥과 같다 하여 붙여진 한자말 이름이다.

본래 작대산이 그리 변한 것으로 여겨진다. 마을 안산인 겹산은 서쪽에 안짝골을 거느리고 동남쪽에 재짝골을 거느리고 있다.

두 골짜기를 거느리기 때문에 겹산[雙山, 重山]이라 한 것으로 보인다. 안짝골과 재짝골의 ‘짝’도 ‘겹’을 나타내는 말이라는 점에서 겹산의 이름을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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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암산의 능선

마을의 젖줄이라 할 수 있는 달천동은 ‘山川[달천]’을 나타낸 말인지 ‘北川[달천]’이라는 말인지 분별하기 어렵다.

얼음골 은 한번 언 얼음이 늦은 봄에나 녹으니 그리 불렀을 것 같고, 진독골은 ‘길고 큰 돌(바위)이 있는 골, 아니면 둑 같은 긴 능선이 있는 골’이라는 이름 같으나 알 수 없다.

농암산 바로 아래 ‘농바골’이 있고, 토끼가 많다 하여 붙여졌다는 토까이떼가 있으며, 그 외 원골, 송골, 큰골, 작은골 등이 농암산 자락에 있다.

마을 동북쪽에 있는 작은산을 똥메라고 한다. 본래 독뫼(獨山)였는데 말할 때 동메로 변하고 다시 똥메로 변한 것이다. 구메는 마을에서 북쪽으로 떨어진 산자락에 있는 들이름이다. 구산(龜山)을 우리말식으로 불렀던 이름으로 여겨진다. 구메 아래쪽 새터에 허목이 만들었다는 달천구천(達川龜泉)도 실재로는 구메에 있는 샘이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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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뫼(똥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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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천구천

조상껄 은 마을 바로 아래에 있는 들인데, 그곳에는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만들어진 조산(造山)이 여럿 있었다. 마을의 풍수사상을 엿보게 하는 지명이다. 보매기, 들판, 새미골, 가장골, 논골, 방고, 반뜽, 대밭, 산지등, 장대, 종재울 등도 나름대로 의미를 지닌 이름이건만 다 말하지 않는다.

동쪽을 나타내는 말인 ‘살~새’의 흔적이 남아 있는 지명으로 새빠등, 새바골이 있고, 반곡(盤谷)에서 변한 방고와 반뜽도 마찬가지로 보인다. ‘반(盤)이 우리말로 ‘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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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과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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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앞 들

농경과 관련하여 큰보, 작은보(대밭보)가 있으며, 샘 이름으로는 참새미와 통새미 등이 있고, 서짓골못과 장대못이 있다.

마을은 큰깍단과 작은깍단으로 나누어진다. 마을 가운데를 흐르는 내를 기준으로 남쪽 마을이 큰깍단이고, 북쪽이 작은깍단이다. 작은깍단 뒤의 구릉은 독뫼로 연결되고 화천리 앞산까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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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새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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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깍단(오늘쪽)과 작은깍단(왼쪽)

[정보제공자]

이성대(남, 1953년생, 외감마을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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