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5004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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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天安都督府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 |
지역 | 충청남도 천안시 |
시대 | 고려/고려 전기 |
집필자 | 문철영 |
[정의]
고려 시대 태조 왕건이 930년(태조 13)에 군사적 목적으로 도솔의 땅을 합해 만든 행정 구역.
[개설]
백제에 기원을 두고 있는 직산·목천과는 달리 천안군의 출발은 고려 건국 이후였다. 고려 시대 천안 지역은 천안부와 그 영현인 풍세현과 직산현, 그리고 청주의 목주(木州)가 있었다. 930년(태조 13)에 삼국의 전략적 요충지인 동서 두솔(兜率)을 합해 천안도독부로 삼았다.
[제정 경위 및 목적]
후삼국을 통일하는 데 전략적 요충지인 지금의 천안 지역에 태조 왕건은 군사적 목적으로 천안도독부를 세웠다.
[관련 기록]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제1권 태조 경인 13년(930)을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가을 8월에 대목군(大木郡)에 행차하여 동서두솔(東西兜率)을 합쳐서 천안부(天安府)라 하고 도독(都督)을 두었으며, 대승(大丞) 제궁(弟弓)을 사(使)로, 원보(元甫) 엄식(嚴式)을 부사(副使)로 삼았다.”[秋八月 幸大木郡 合東西兜率 爲天安府 置都督 以大丞弟弓 爲使 元甫嚴式 爲副使.]
[내용]
태조가 대목군[목천]에 행차하여 동서 두솔을 합하여 천안도독부를 삼았으며, 대승 제궁을 [도독부]사로 삼고 원보 엄식을 부사로 삼았다.
고려 태조 왕건이 술사 예방(倪方)의 말을 듣고 왕자산[또는 태조산]에 올라가서 지세를 살핀 후에 성을 쌓고 천안도독부를 두었다고 전해진다. 이로 인해 일명 왕자산성이라고도 한다. 이때 태조는 탕정(湯井)[지금의 충청남도 아산시]·대목악(大木岳)[지금의 충청남도 천안시 목천]·사산(蛇山)[지금의 천안시 직산] 등 주변 지역의 땅을 각각 분할하여 천안이라는 새로운 행정 구역을 만들었다.
[변천]
마한 목지국의 중심이었다고 추정되는 천안은 백제에 병합된 후 직산, 목천 등의 군현으로 편제되었다. 천안의 북쪽에 위치한 직산은 예로부터 백제 온조왕의 치소, 위례성으로 기록되어 있는 지역이었는데, 고려 초에 직산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동쪽 편에 위치한 목천은 백제 때 대목악이었다가 757년에 대록군이 되었으며, 고려 성종 때 목주라는 이름을 갖게 되고, 조선에 들어서 1413년에 목천현이라 하게 된다.
백제에 기원을 두고 있는 직산·목천과는 달리 ‘천안군’의 출발은 고려 건국 이후였다. 태조 왕건이 삼국의 전략적 요충지인 동서 두솔을 합해 930년에 후백제 공략을 위한 군사적 거점 도시로서 천안부(天安府) 도독(都督)을 둔 것이 그 출발이기 때문이다. 고려 시대 천안 지역은 천안부와 그 영현인 풍세현과 직산현, 그리고 청주의 목주(木州)가 있었다.
995년(성종 14)에 환주(歡州)라 개칭하고 도단련사(都團練使)를 설치하였다가, 1005년(목종 8)에 단련사를 폐하였다. 이후 1018년(현종 9)에 천안이라 다시 칭하고 지부사(知府使)를 두었다. 1310년(충선왕 2)에 군명을 영주(寧州)라 개칭하고, 1362년(공민왕 11)에 다시 천안부로 복칭되었는데, 별호는 임환(任歡)이었다.
조선 시대에 들어서 1413년(태종 13)에 천안부를 영산군(寧山郡)으로 고쳤고, 1416년 다시 천안군으로 고쳐 조선 말까지 계속되었다.
[의의와 평가]
천안도독부는 후백제 정벌을 위한 전초기지로 삼으려는 군사적 거점이었다. 그러나 천안도독부 설치의 명분으로 풍수지리설을 이용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다섯 용이 구슬을 다투는 형국을 가졌다는 오룡쟁주지세라는 풍수지리적 배경을 들고 나왔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