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5006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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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申自敬先生墓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능묘 |
지역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북면 오곡리 산58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상엽 |
피장자 생년 시기/일시 | 1402년 - 신자경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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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장자 몰년 시기/일시 | 1470년 - 신자경 사망 |
문화재 지정 일시 | 1988년 8월 30일 - 신자경선생묘 충청남도 기념물 제69호로 지정 |
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신자경선생묘 충청남도 기념물 재지정 |
현 소재지 | 신자경선생묘 - 충청남도 천안시 북면 오곡리 산58 |
성격 | 봉토묘 |
관련 인물 | 신자경 |
봉분 크기/묘역 면적 | 14m[가로]|11m[세로]|4.5m[높이]|661㎡[묘지 면적] |
소유자 | 평산 신씨 좌상 공파 종중 |
관리자 | 평산 신씨 종중 |
문화재 지정 번호 | 충청남도 기념물 |
[정의]
충청남도 천안시 북면 오곡리에 있는 조선 전기 신자경의 묘.
[개설]
세조 때 활동한 신자경(申自敬)[1402~1454]의 무덤이다. 신자경은 본관이 평산이고, 태조 원종공신 신효창(申孝昌)의 아들이다. 신자경은 조선 세조 때의 문신으로 군자감, 오위 대호군, 상호군, 병조 판서 등의 관직을 거치며 중앙에서 활약하였다. 아버지 신효창의 묘는 경기도에 있지만, 충청도 목천은 신자경의 전장(田莊)이 있는 고향이라 그의 묘소를 썼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목천과 신자경의 관련에 대해 몇 가지 기사가 보인다.
우선 『세종실록』[1446년 12월 18일]에 충청도 전의현에 살았던 박팽년이 아버지 박중림의 무고에 대해 논하는 기사가 있는데, 여기서 ‘신자경의 집을 가리켜서 목천(木川)의 관원이라 하였다……’라는 내용이 있다. 따라서 이미 세종 때 목천에는 신자경의 집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문종실록』[1451년 9월 21일]에 신자경이 파면 당하는 부분이 나오는데 ‘목천 땅 시골 농장에 절을 짓고 기와를 굽는 것을 확인하고자 병을 칭탁하고 목천으로 가서 녹봉을 받았다.’는 내용이다. 임금은 신자경이 공신의 후예이므로 장(杖) 100대를 때릴 수는 없으니 직무를 파면하라는 명을 내렸다. 이와 같은 기록으로 보면 신자경은 이미 목천에 집과 농장이 있으며, 사찰을 건립하려고 할 만큼 목천 땅과 깊은 인연을 가지고 재력을 갖추었음을 알 수 있다.
신자경은 말년에 충청도 목천의 오동 마을에 낙향하여 살다 그 곳에서 죽었다.
[위치]
신자경선생묘(申自敬先生墓)는 충청남도 천안시 북면 오곡리에 있다. 북면사무소에서 위례성로를 따라 남쪽의 위례 초등학교 방향으로 300m 가면 좌측에 학교 방향으로 들어가는 오곡 2길이 있다. 이곳으로 1.3㎞를 들어가 오곡 2리 마을 회관 앞에서 오곡 4길로 200m 정도 들어가면 낮은 야산의 하단에 신자경 묘가 위치한다.
[변천]
신자경의 사후 묘가 조성되었고, 후손들에게 전해지기로는 신도비가 세워졌는데 이후 없어졌다고 한다.
[형태]
조선 시대의 일반적인 무덤과 달리 규모가 매우 크다. 봉분은 가로 14m, 세로 11m의 사각형이며 높이 4.5m, 묘지 면적 661㎡이다. 둘레는 호석(護石)으로 눌렀으며 문신상 2개가 좌우에 있고 장명등이 묘비와 함께 있다. 묘 아래쪽에는 후손들이 최근에 세운 비가 1기(基) 있다.
[금석문]
묘비는 호패형으로 전면에 ‘경태 5년 갑술 2월 23일 합장 영가부 공인 권씨지묘 절충장군 행대호군 신자경지묘(景泰五年甲戌二月二十三日合葬 永嘉府恭人權氏之墓 折衝將軍行大護軍申自敬之墓)’라고 새겨져 있다.
[현황]
최근 발간된 각종 기록과 문화재 정보 자료에는 신자경의 몰년이 1470년으로 표기되어 있으나 묘비에는 ‘경태 5년 갑술(景泰五年甲戌)’이라 하였으므로 1454년이 맞다. 또한 신자경선생묘는 1988년 8월 30일 충청남도 기념물 제69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충청남도 기념물로 재지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신자경선생묘는 조선 초기의 묘가 드문 가운데 과거의 양식이 거의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어 문화재로서 가치가 높다. 또한 조선 초기 목천 지역 내 유력한 인물의 활동상을 연구하는데 있어 중요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