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500621
한자 韓明會先生神道碑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비
지역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수신면 속창리 산11-1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홍제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1415년 - 한명회 출생
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1487년 - 한명회 사망
건립 시기/일시 1488년연표보기 - 한명회선생신도비 건립
문화재 지정 일시 1994년 11월 4일연표보기 - 한명회선생신도비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32호로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21년 11월 19일 - 한명회선생신도비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재지정
현 소재지 한명회선생신도비 - 충청남도 천안시 수신면 속창리 산 11-1 지도보기
성격 신도비
관련 인물 세조|서거정
재질 화강암
크기(높이, 너비, 두께) 324㎝[총 높이]|97㎝[비신 폭]|24.5㎝[두께]
소유자 청주 한씨 종중
관리자 한희연
문화재 지정 번호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정의]

충청남도 천안시 수신면 속창리에 있는 조선 전기 한명회의 신도비.

[개설]

한명회(韓明澮)[1415~1487]의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자준(子濬), 호는 압구정(狎鷗亭)사우당(四友堂), 시호는 충성(忠成)이다. 장순 왕후(章順王后)[예종의 비]와 공혜 왕후(恭惠王后)[성종의 비]의 아버지이다.

젊은 시절 수차례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고 40세가 다 되어 1452년(문종 2) 음보(蔭補)로 관직에 진출하였다. 그 뒤 수양 대군의 무리에 가담하여 1453년(단종 1) 계유정난 때 정난공신(靖難功臣) 1등으로, 세조가 즉위한 후에는 좌익공신(佐翼功臣) 1등으로 녹훈되었다. 수많은 고위 관직을 두루 역임하면서도 오지였던 북방으로 파견을 나가는 것을 꺼리지 않아 북방을 견고하게 하는 데 공을 쌓았다. 세조의 신임으로 1461년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에 진봉되었고 우의정과 좌의정을 거쳐 1466년 영의정이 되었다. 그 후 익대공신(翊戴功臣) 1등에 올랐고, 성종이 즉위하자 원상(院相)이 되어 세도가 절정에 이르렀다. 1471년 좌리공신(佐理功臣) 1등이 되었지만, 점차 권세가 추락하여 1474년(성종 5)에 탄핵되어 모든 관직에서 삭탈되었다.

한명회선생신도비(韓明會先生神道碑)의 비명은 당대 최고의 문장가였던 서거정(徐居正)[1420~1488]이 지었고, 비문은 『속동문선』에 수록되었다.

[건립 경위]

한명회가 사망하자 청주에서 장례를 치렀다. 청주는 한명회의 본향이면서 농장이 있던 곳이다. 현재 묘역은 천안시 권역이지만, 수신면 속창리는 조선 시대 청주목에 속해 있었다.

한명회선생신도비는 묘역이 조성되고 1년 만인 1488년에 건립되었다. 생전에 권세를 누렸지만, 1504년 갑자사회 때에 윤비(尹妃) 사사(賜死) 사건에 관련되었다 하여 부관참시를 당하며 묘가 파헤쳐지고 석물(石物)이 훼손되는 수모를 겪었다. 그러나 중종 즉위 직후 신원되면서 후손들이 묘역을 다시 조성하였다. 이때 땅속에 묻혀 있던 신도비도 다시 세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위치]

한명회선생신도비충청남도 천안시 수신면 속창리에 있다. 장산 1리 마을 회관에서 남쪽으로 600m 거리에 있는 경부 고속도로 상행 방향에 접하여 한명회 선생의 신도비와 묘역 및 재실이 자리한다.

[형태]

비좌(碑座)는 측면에 10개의 안상(眼象)이 있고, 윗면에는 12개의 복련(覆蓮)[꽃부리가 아래쪽으로 향한 연꽃] 연꽃무늬가 조각되어 있다. 비신(碑身)은 석질이 좋지 않은 석영암이어서 비문의 마멸이 심하다. 이수(螭首)는 두 마리 용이 여의주를 다투는 형태로 무늬가 매우 화려하다. 총 높이는 324㎝, 비석 받침은 160㎝×114㎝, 비신의 폭은 97㎝, 두께 24.5㎝이다.

[현황]

한명회 선생의 묘역과 신도비 및 재실은 청주 한씨 충성공 묘역과 접해 있어 후손들에 의해 잘 관리되고 있다. 이 중에 한명회선생신도비는 1994년 11월 4일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32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충청남도 문화재자료로 재지정되었다.

묘역에서 도굴당했던 지석(誌石)을 2009년에 되찾은 사건은 문화재 보호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주기도 하였다. 또한 한명회 선생의 묘역과 신도비 및 재실은 천안 시티 투어의 주요 거점이기도 하다.

[의의와 평가]

한명회는 한국사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 중 하나로 생전에는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고 사후에도 수백 년간 끊임없이 재평가 되고 있다. 한명회의 일대기는 수많은 드라마와 소설의 단골 소재가 되며, 천안시의 대표적인 역사 문화 콘텐츠가 될 수 있는 문화재이다.

한명회가 살아 온 시대와 활약상, 가계 등이 상세히 기록된 신도비는 매우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지니며 특히 당대 최고의 문장가인 서거정의 글이라는 점에서도 주목된다. 이수의 화려한 조각은 조선 전기 신도비 형태를 연구하는 데 좋은 자료이기도 하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