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5007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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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黃世得 |
이칭/별칭 | 사구(士求),충장(忠壯)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천안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김경수 |
출생 시기/일시 | 1537년 - 황세득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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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564년 - 황세득 무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596년 - 황세득 사도 첨사 부임 |
몰년 시기/일시 | 1598년 - 황세득 사망 |
묘소|단소 | 황세득 묘소 - 충청남도 천안시 직산면 마정리 용와산 |
정려 | 황세득·황박 정려각 - 충청남도 천안시 직산읍 마정리 |
성격 | 무신 |
성별 | 남 |
본관 | 성주(星州) |
대표 관직 | 장흥 부사|사도 첨사 |
[정의]
조선 시대 천안 출신의 무신.
[개설]
황세득(黃世得)[1537~1598]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李舜臣)의 막하 장수로 무공을 세웠다.
[가계]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사구(士求)이다. 아버지는 감찰을 지낸 황종식(黃鍾植)이며, 어머니는 강위빙(姜渭聘)의 딸 진양 강씨(晋陽姜氏)이다. 부인은 방인(方寅)의 딸 상주 방씨(尙州方氏)로, 이순신의 부인 방씨의 사촌 언니이다. 아들은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우고 병자호란에 종군하여 전사한 황박(黃珀)이다.
[활동 사항]
황세득(黃世得)[1537~1598]은 직산 출신으로 1564년(명종 19) 무과에 급제하였다. 병서에 능통하였으며, 장흥 부사 역임 시 임진왜란이 발생했다. 1596년(선조 29) 6월 사도 첨사에 부임하여 통제사 이순신의 휘하에서 큰 전공을 세웠다. 특히 벽파정과 고금도 전투에서는 왜군 수십 명을 사살하였다.
1598년(선조 31) 9월에 명나라 원군 진린 제독이 이끄는 병력 1만 5천과 우리 수군이 연합하여 10월 2일 예교 북쪽에서 왜적을 섬멸하는 일대 작전을 전개할 때, 황세득은 통제사 이순신 함대의 선봉을 맡아 적선을 불태우며 진격하여 적진의 심장부까지 파고 들어갔다. 이를 본 왜장들이 수십 명의 명사수를 골라 한꺼번에 떼를 지어 황세득을 에워싸고 집중 사격을 가하였다. 황세득은 적군의 집중 사격을 받아 장렬히 전사하였다.
이순신은 황세득이 전사했다는 보고를 받고 가슴을 치며 “세득이 죽었으니 나는 누구를 믿고 적병과 응전하겠느냐.” 하며 애통해 했다고 한다.
[학문과 저술]
직산현지에는 황세득이 한산도에서 격렬하게 노래를 지어 불렀다는 것을 소개하였다. 그 내용은 충무공 이순신이 지었다는 한산도가와 매우 비슷하다. 내용은 아래와 같다.
한산도월명야(閑山島月明夜)/독기판옥선두(獨倚板屋船頭)/수무척검(手撫尺劒)/심회만곡심수(心懷萬斛深愁)/하처일성장적(何處一聲長笛)/사첨수(使添愁)
한산섬 달 밝은 밤에/판옥선 머리에 홀로 기대어/검을 어루만지며/만곡의 심회에 시름도 깊은데/어디서 일성의 피리소리가/시름를 더하게 하네
[묘소]
묘소는 처음 충청남도 아산시 탕정면 용두리 앵성산에 있었는데, 1987년 4월에 천안시 직산면 마정리 용와산으로 이장하였다. 마정리는 천안시와 아산시의 경계가 되는 곳이며, 성주 황씨 종중이 이 곳에 있다.
[상훈과 추모]
김육(金堉)은 이순신의 묘지명을 찬할 때 황세득의 사적을 기록하였고, 이항복(李恒福)은 여수 「충민사기(忠愍祠記)」에 황세득의 사적을 기록하였다. 150여 년이 지난 1704년(숙종 30)에 직산읍 선비들의 상소로 충장(忠壯)이라는 시호와 함께 호조 참판에 추증되었으며, 아들 황박과 함께 충신 정려가 내려졌다. 황세득·황박 정려각(黃世得·黃珀 旌閭閣)이 충청남도 천안시 직산읍 마정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