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5008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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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黃宗海 |
이칭/별칭 | 대진(大進)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충청남도 천안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김경수 |
[정의]
조선 시대 천안 출신의 문인·학자.
[개설]
황종해(黃宗海)[1579~1642]는 천안 출신으로,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하이다. 목천에 서원이 없는 것을 한탄하여 후학들의 강학처를 제공하고자 도동 서원을 세웠다. 목천 제1의 유학자로 추앙받고 있다.
[가계]
본관은 회덕(懷德), 자는 대진(大進)이다. 할아버지는 황윤림(黃潤琳)이고, 아버지는 황덕휴(黃德休), 어머니는 참봉(參奉) 성우(成羽)의 딸 창녕 성씨(昌寧成氏)이다. 부인은 이홍벽(李弘璧)의 딸 전주 이씨(全州李氏)이며, 황덕기(黃德基)가 숙부이다.
[활동 사항]
1610년(광해군 2)에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의 행장을 지었다. 1611년(광해군 3)에 정인홍(鄭仁弘)이 이황(李滉) 등을 모함하자 호남·호서의 선비들과 함께 상소하여 정인홍을 논척하기도 하였다. 1613년(광해군 5)에 광해군이 대비를 서궁에 유폐하자 과거 공부를 폐하고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이후 장유(張維)가 천거하여 후릉 참봉(厚陵參奉), 동몽교관(童蒙敎官)으로 제수되었으나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1632년(인조 10)에 최명길(崔鳴吉)과 목서흠(睦敍欽)의 천거로 영릉 참봉(英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역시 나가지 않았으며, 1640년(인조 18) 장원 별제(掌苑別提)에 제수되었으나 역시 나가지 않았다.
황종해는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지만 도학에 깊은 관심을 가져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을 만나 예를 논하고 묻기도 하였다. 「퇴도 선생 산거시 발(退陶先生山居詩跋)」, 「심성정리기설(心性情理氣說)」 등의 문장을 지었다. 또한 남전 향약(藍田鄕約)을 정리하여 「촌규범례(村規凡例)」 46조를 만들기도 하였다. 1642년(인조 20) 12월 24일에 사망하니, 안여룡(安汝龍)·김광훈(金光勳) 등이 장례를 맡아 삼성동(三省洞)에 장사를 지냈다.
[학문과 저술]
문집인 『후천집(朽淺集)』은 1713년(숙종 39)에 후손 황응하(黃應河)와 황찬(黃燦)이 고성현(固城縣)에서 간행했다. 문집에는 시·편지·문답·소차·잡저 등이 실려 있으며, 원집 8권과 부록으로 이루어져 있다.
[상훈과 추모]
1650년(효종 1)에 죽림 서원(竹林書院)에 배향되었다. 조선 인조 때 목천에 건립되어 1676년(숙종 2)에 사액된 도동 서원(道東書院)에도 배향되었다. 목천 도동 서원은 1871년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