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5010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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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吳莫生父子 |
분야 | 종교/유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효자·열녀 |
지역 | 충청남도 천안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김종식 |
[정의]
조선 시대 천안 출신의 효자.
[가계]
오막생(吳邈生)의 아들이 오계학(吳桂鶴)이다.
[활동 사항]
오막생(吳莫生)은 천안시 직산읍 마정리 미륵산(彌勒山) 부근에 살았다. 그는 학문을 배우지 못하였으나 천성이 순하여 부모를 잘 섬겼으며, 힘을 다하여 봉양하였다. 아버지가 일찍이 병석에 눕자 밤낮으로 곁을 떠나지 않았고, 아버지의 속옷을 손수 빨아 항시 청결하게 모셨다. 추운 겨울에도 목욕재계하고 하늘에 빌어 자신이 아버지의 병을 대신할 것을 청하였다. 아버지가 죽자 곡성이 애절하였고, 제사에는 반드시 생전에 좋아하시던 것을 모두 갖추었다. 눈이 오면 반드시 비를 들고 묘소의 눈을 쓸었고, 손발이 얼어 터지더라도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오막생과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한다. 오막생은 부모의 묘소에 소나무를 심었는데, 벌레가 일어 나무가 시들어가자 이를 잡아 산신에게 올리고 향을 피운 뒤 눈물로 호소하였다. 그 후로 묘소에 심은 나무에 다시는 벌레가 생기지지 않았다고 한다.
오막생의 아들 오계학 역시 천안 출신으로 천성이 순하여 부모를 잘 봉양하였다. 항상 부모에게 맛있는 음식을 차려 드리고, 더운 때와 추운 때에 불편함이 없도록 살폈다. 아버지가 전염병에 걸렸을 때는 가족들에게 모두 피하여 나가 있게 하고 홀로 곁을 떠나지 않았다. 아버지의 병세가 위독해지자 가슴을 치고 하늘에 빌며 부르짖는 소리가 밤이 깊도록 그치지 않고 매우 처절하였다. 이를 본 이웃과 마을 사람들이 감복하여 여러 방법으로 오계학을 도와주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장례와 제사를 예법에 맞도록 지성으로 치렀으며, 무덤 옆의 여막에서 비린내 나는 것을 먹지 않고 죽을 마시며 삼년상을 치르는 동안 몸이 마르고 뼈만 앙상하게 남아 지팡이를 짚고서야 겨우 일어났으며, 늘 부모의 얼굴을 다시 볼 수 없는 것을 지극히 원통하게 여겼다. 시묘 살이를 마친 뒤에도 마친 뒤에도 잔치에 참석하지 않았고, 아버지가 죽기 전과 같이 웃거나 이야기하지 않으며 죽을 때까지 부모를 잊지 못했다고 한다.
아버지가 병중에 꿩 고기 구이를 먹고 싶다고 해서 사냥을 나갔으나 종일토록 잡지 못하고 돌아왔는데, 그날 저녁에 갑자기 꿩 한 마리가 부엌 아래로 날아 들어와 잡아서 구워 드렸다는 일화가 전하고 있다.
아버지 오막생도 효행으로 정려(旌閭)를 받았으며, 오계학의 며느리도 열녀로서 정려가 내려졌다.
[상훈과 추모]
1752년(영조 28)에 직산읍에 거주하던 진사 최진보(崔鎭普)가 상소하여 정문이 내려졌다. 충청남도 직산읍 마정리 미륵산 아래 미륵댕이에 오막생·오계학 부자의 정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