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5017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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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近代敎育 |
분야 | 문화·교육/교육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남도 천안시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김형목 |
[정의]
1895년에서 1945년 광복 이전까지 천안 지역에서 이루어진 교육
[개설]
근대 교육은 부국강병을 위한 시무책 일환으로 시행되었다. 공교육이 부진한 상황에서 지방관과 유지제가 합심하여 설립한 사립 학교는 이를 담당하였다. 특히 을사늑약 이후 고조되는 국망(國亡)에 대한 위기의식은 사립 학교 설립 운동과 야학 운동을 추동시키는 계기였다. 한글·역사·지리와 체조 등을 중시한 이유는 민족의식과 상무 정신을 고취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근대 교육을 교육 구국 운동으로 성격을 규정하는 이유는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사립 학교]
천안 지역 근대 교육은 1906년 직산 흥환 학교와 천안 일어 학교에서 시작되었다. 직산군 주사 오국영은 일찍부터 근대 교육 보급에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학부에서 훈도를 파견하기 전에 명예 교사로서 열성을 다하였다. 신사 유지의 자발적인 참여는 주민들에게 근대 교육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각인시켰다.
의성 학교 개칭과 아울러 교사 신축도 단행하는 등 교육 내실화에 노력했다. 의연금 모집 당시 경쟁적인 참여는 교육열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한응이·민옥현·최두경·원긍연·김봉각 등은 이를 주도하였다. 이들은 의친왕을 교장으로 추대하는 등 전국적인 주목을 받았다. 직산군수 지희열은 경위 학교·의성 학교 유지를 위한 대책을 관내 주민들과 협의하는 등 관심을 유도하였다. 소유 전답에 따라 부과하는 ‘의무 교육비’는 주민들 결의로 시행되는 계기를 맞았다.
목천군수 남계석은 학생들에게 향학열을 고취시키는 등 이에 동참하고 나섰다. 그는 3년 전에 설립한 병진 학교가 재정난에 직면하자, 관내 면장과 군 주사 등과 합의한 후 의연금을 갹출하였다. 또한 관내를 순회하면서 학부형과 자산가 등에게 학교 운영 참여도 권유하는 등 재정 마련에 노력을 기울였다.
천안군수 안기선은 유지 등과 영진 학교 설립을 주도하였다. 이들은 건원절 경축 행사를 개최하는 등 학생들에게 국가 의식과 자긍심을 고취시켰다. 학령 아동 입학율은 사립 학교 설립과 더불어 급속하게 증가되는 추세였다. 한편 안국선은 이곳을 지나다가 향학열을 북돋우는 연설을 한 다음 연필·석판 등 학용품 일체를 지원하였다. 한말 천안 지역 근대 교육 기관은 〈표-1〉과 같다.
@@GC04501785_01_1906~1910년 천안 지역 사립 학교 현황
[야학 운동]
근대 교육 운동은 사립 학교 설립 운동과 더불어 야학 운동도 병행되기에 이르렀다. 직산군 월경리 원긍연은 오한영·김동식 등과 관내에 소재한 사립 학교 임원들도 야학 설립에 앞장섰다. 이들의 노력으로 무려 300여 명에 달하는 야학생이 출석하는 등 대성황이었다. 야학을 통한 근대 교육은 사립 학교 설립 운동을 무색하게 하는 등 향학열을 고조시켰다. 야학은 근대 교육 기관으로서 각인되는 한편 널리 확산되는 계기였다. 문맹한 성인이나 근로 청소년에게 야학은 오늘날 사회 교육 기관인 ‘평생 교육원’으로서 의미를 지닌다.
@@GC04501785_02_한말 천안 지역 야학 현황
원긍연 등이 세운 국문 야학은 이러한 인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곧 “문자는 각 나라의 애국 정신을 고취하는 근원이다. 국가 정신이 없는 나라는 결코 부강할 수 없는 동시에 멸망할 수밖에 없다. 이는 조국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한 채 외국을 숭배하는 사대성이 팽배하기 때문이다. 애국정신의 근원은 곧 자국어를 제대로 익히고 사용하는 데 있다.” 이러한 취지에 따라 국문 야학을 설립한다고 그는 역설하였다.
한글에 대한 관심은 식민지화에 대한 위기의식과 더불어 고조되었다. 국문 학교 설립 계획이나 국문 야학 성행은 이러한 사실을 반증한다. 한글에 대한 관심은 교육열 고조로 이어졌다. 노동 야학은 이러한 상황과 맞물러 발전을 거듭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단순한 지식 습득 차원에만 머물지 않고 새로운 노동자상을 창출하기에 이르렀다. 노동 가치·임금 등 노동자와 관련된 사회적인 인식 변화는 이와 맞물려 진행되었다.
[근대 교육의 영향]
문명 학교를 비롯한 인근 진천 관내 5개 학교와 연합하여 목천 병천 학교에서 개최된 운동회는 성황을 이루었다. 참가한 수백 명 학도들은 정정당당한 경쟁과 늠름한 기상은 주민들 탄성을 자아내었다. 이처럼 운동회는 학생들에게 상무 정신을 일깨우는 현장이었다. 주민들도 참여를 통하여 시세 변화에 부응한 새로운 생활 문화를 창출하는 계기를 맞았다.
성환 의성 학교 학생 50여 명과 임원 20여 명 등은 순종 황제 즉위 1주년을 맞아 제등 행렬 등 대대적인 경축 행사를 벌였다. 주민들의 적극적인 호응은 사회 구성원으로서 자기 존재성을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근대 교육에 대한 높은 관심과 지원으로 이어졌다. 생활 정도에 따른 ‘의무 교육비’ 징수에 의한 사립 학교 운영은 이와 같은 성격을 그대로 보여준다. 교장인 영국인 선교사 부재열(夫在烈)은 일본인 환영을 위한 일장기 게양을 거부하였다. 일본 경찰과 헌병의 강요에도 자신의 주장을 끝까지 철회하지 않음으로써, 학생들에게 한국인으로서 자긍심을 높여 주었다.
3면 1교제와 1면 1교제를 주요 골자로 하는 초등 교육은 식민지화와 동시에 식민지 노예 교육 기관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일제는 ‘시세와 민도’를 구실로 우민화 교육을 획책하였다. 3·1 운동 이후 개조론이 풍미하는 가운데 교육열은 다시 발흥하게 되었다.
청년 단체나 계몽 단체를 중심으로 야학·강습소는 우후죽순처럼 마을마다 설립되는 등 향학열에 부응하였다. 사립 천안 유치원 설립은 유아 교육에 대한 관심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다. 1931년 만주 사변과 1937년 중일 전쟁 이후 사립 교육 기관은 민족 말살 정책으로 식민 정책을 홍보하는 선전 도구로 변질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