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8003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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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靑松義陣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북도 청송군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권대웅 |
[정의]
1896년 3월 경상북도 청송 지역에서 결성된 의병 부대.
[개설]
1896년 3월 창의한 청송의진(靑松義陣)은 청송 유림(儒林)이 주도한 의병진으로 주변 각처 의병진과 상호협조 체제를 구축하고 활동하였다. 따라서 청송의진은 의성의진(義城義陣) 및 이천의진(利川義陣)과 연합하여 의성연합의진(義城聯合義陣)을 결성하고 감은리전투(甘隱里戰鬪)를 수행하였으며, 경주연합의진(慶州聯合義陣)의 결성에 참여하여 경주성전투(慶州城戰鬪)를 수행하였다. 그리고 영덕연합의진(盈德聯合義陣)의 결성에 참여하여 영덕전투(盈德戰鬪)를 수행하였다. 뿐만 아니라 흥해출진소(興海出陣所)와 영덕출진소(盈德出陣所)를 설치하여 경상북도 동해안 일대에서 불굴의 항전을 전개하였다.
[역사적 배경]
1894년 갑오변란(甲午變亂)과 1895년 을미사변(乙未事變), 변복령(變服令), 단발령(斷髮令) 등을 계기로 일본 제국주의 세력과 개화파 관료집단에 대한 직접적인 투쟁이 시작되었다. 이리하여 친일내각과 일본 흉적(凶賊), 그리고 단발을 강행하는 지방관리인 왜관찰사(倭觀察使), 왜군수(倭郡守) 등을 표적으로 안동을 비롯한 그 관할 16개 군 중 14개 군에서 각기 의병진이 결성되었다.
[경과]
청송의진은 1896년 1월 16일 창의한 안동의진(安東義陣)에 비해 두 달 늦은 3월 16일 결성되었다. 전국 각처에서 의병이 창의하고 있는 상황에서 국왕 고종의 애통조(哀痛詔)가 청송 지역에도 전해지고, 주변 각 의병진에서 발하는 통문(通文)과 격문(檄文)이 날아들었다. 1896년 3월 7일 안동의진의 소모장(召募將)인 유시연(柳時淵)이 청송으로 들어왔다. 3월 9일 유시연은 청송 관아의 군기(軍器) 탈취를 시도하고 거의(擧義)를 촉구하는 격문을 청송 유림들에게 보냈다. 이에 고무된 청송 유림들이 토적복수(討賊復讐)를 기치로 내걸고 창의를 추진하였다.
1896년 3월 10일 청송 유림에서는 향중(鄕中) 4면(面)에 통고(通告)하여 의병진의 결성을 위한 향회(鄕會)를 개최하였다. 이어서 3월 12일 청송 유림 100여 명이 향회를 개최하여 창의하였다. 그리고 이날 오후 객사(客舍)에서 창의장(倡義將)으로 심성지(沈誠之)를 추대하였다. 3월 13일 심성지는 객사로 나아가 창의장을 수락하였다. 3월 15일 유생(儒生) 조성규(趙誠奎)와 권복규(權福奎)가 임파록(任爬錄)을 작성하여 부장(副將) 조성박(趙性璞), 우익장(右翼將) 권성하(權成夏), 좌익장(左翼將) 김상길(金相吉)을 내정하고, 참모(參謀)와 서기(書記) 이하를 선발하였다.
청송의진은 3월 16일 대장기(大將旗)를 세우고 남천(南川) 백사장에서 처음 훈련을 실시하였다. 3월 17일 축문(祝文)과 창서사(唱誓辭)를 낭독하며 천신과 지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3월 22일 김대락(金大洛)을 중군장(中軍將), 남두희(南斗凞)를 우익장, 서효원(徐孝源)을 의영도지휘사(義營都指揮使)로 임명하여 진용을 갖추었다.
4월 6일에는 효율성과 재정 절약을 위해 진영을 3영(營)으로 합하고, 참모 4인과 서기 6인으로 편성하여 비용을 절감하도록 하였다. 4월 29일에는 청송의진의 휘하 각 부대를 창의장 중심으로 편성하여 상영(上營)[총영(摠營) 혹은 내영(內營)]과 그 아래 각 영(營)으로 편제하였다. 상영은 대장(大將)을 중심으로 부장, 그 아래 중군(中軍)과 좌·우익장, 그리고 각 영은 사병도총(司兵都摠)과 소모장으로 편제하였다.
한편, 청송의진은 부(府) 4면에 해당하는 부내(府內), 부서(府西), 부남(府南), 부동(府東)과 현(縣) 5면에 해당하는 현내(縣內), 현동(縣東), 현남(縣南), 현북(縣北), 현서(縣西)에 각각 외방장(外防將)을 설치하여 면군체제(面軍體制)를 갖추었다. 그리고 5월 9일 흥해출진소와 5월 22일 영덕출진소를 설치하였다. 뿐만 아니라 5월 13일 의성의진·이천의진과 연합하여 의성연합의진을 결성하고 5월 14일 감은리전투에서 관군을 상대로 크게 이겼다.
청송의진은 5월 25일 관군의 추적과 고종의 칙유(勅諭)에 따라 본진을 해산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8면으로 분진하여 외방장을 중심으로 하는 면군체제로 전환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청송의진은 6월 15일 경주연합의진을 결성하고 6월 18일 경주성전투를 벌였으며, 6월 28일 영덕연합의진의 결성에 참여하여 7월 13일과 14일 영덕전투를 벌였다. 그리고 7월 20일경 귀향하여 화전등전투(花田嶝戰鬪)[꽃밭등전투]에서 크게 패하고 각처를 전전하다가 해산하였다.
[결과]
청송의진에 참여하였던 유생들은 대부분 은거하였다. 창의장 심성지는 산속에 은거하며 경사(經史)를 연구하고, 나아가 문하생들과 향음례(鄕飮禮)를 행하고 백록동규(白鹿洞規)와 남전향약(藍田鄕約)을 강독하였다. 그러나 체포는 면하였지만 가옥은 전소되었고, 그 가족들은 많은 고초를 겪게 되었다. 참모 조독호(趙篤祜)는 ‘폐문자수(閉門自守)’하여 은거하였다. 그리고 중군 김대락은 해산 후 상경하여 구국운동에 참여하였다. 김대락은 융릉참봉(隆陵參奉)을 거쳐 김해부사(金海府使)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의의와 평가]
청송의진은 존왕양이론(尊王攘夷論)을 창의 이념으로 국가와 고을을 수호한다는 목표로 창의하였다는 점에서 근왕주의적 의병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청송의진에 참여하였던 유생들은 청국 연호(年號) 사용과 청국 청원문제(請援問題)를 논의하는 등 청나라를 현실적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따라서 청송의진에 참여하였던 유생들의 대외 인식의 확대라는 관점에서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