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청년운동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800346
한자 日帝强占期靑年運動
영어공식명칭 Japanese Colonial Period Youth Movement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북도 청송군
시대 근대/일제강점기
집필자 허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사회운동

[정의]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청송 지역에서 청년들이 벌인 사회운동.

[역사적 배경]

1919년 3.1운동 이후 민족운동 세력은 그동안의 민족운동을 성찰하고 새로운 운동의 방략과 노선을 모색하였다. 민족운동 세력은 3.1운동이 국내외에서 각계각층이 참여한 거족적인 민족운동이었으나, 비조직적이고 고립 분산적으로 전개되어 구체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고 평가하였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운동을 총체적으로 지도할 수 있는 조직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 결과, 국외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의 수립과 함께 국내에서는 각계각층의 권익을 옹호하고 신장시킬 목적으로 여러 대중조직이 결성되었다. 이 과정에서 청년들도 청년의 이해와 권익을 옹호할 수 있는 조직이 필요하다고 인식하고, 1920년대 초반부터 청년 단체를 결성하였다.

[경과]

청송 지역에서는 1920년대 초반에 청송청년회(靑松靑年會)가 조직되었다. 청송청년회는 창립 당시 전국의 청년 단체들과 마찬가지로 조선총독부의 한국인 관리를 비롯한 지역 유지들이 주도하여 실질적인 청년 단체라고 보기 어려웠다.

1920년대 중반 무렵에는 여성들의 권리 신장과 권익 옹호를 목적으로 청송여자청년회(靑松女子靑年會)가 결성되었고, 1925년에는 종교 단체의 성격을 띤 청송기독청년회(靑松基督靑年會)가 결성되었다. 이 시기 청년 단체들은 청년을 비롯한 지역민에게 주로 봉건의식을 타파하고 근대적인 지식과 사상을 선전하는 활동을 벌였고, 지역민의 친목과 연대를 다지는 운동대회를 가졌다.

[결과]

1920년대 중반부터 사회주의 세력이 사회운동의 주도 세력으로 부상하면서 청년운동에도 많은 변화가 나타났다. 청년들은 조직을 일신하기 위해 혁신총회를 개최해 회원의 연령을 제한하고, 운영 체제를 개선하였다. 1925년 청송청년회도 청년 단체의 발전과 운동을 가로막는 가장 큰 원인이 장년층 중심의 회원과 회장을 비롯한 간부 중심의 운영에 있다고 진단하고, 혁신총회를 통해 회원 가입 연령을 조정하고 민주적인 운영을 위해 집행위원회제를 채택하였다.

1927년에는 진보면에서 진보청년회가 결성되었으며, 청송청년회는 다시 혁신총회를 가져 강령과 규약을 제정하였다. 청송청년회는 아동을 대상으로 노동야학을 운영하였으며, 지역을 순회하며 강연회를 개최하였고, 여성운동을 비롯한 사회운동을 지원하는 활동을 벌였다. 1920년대 후반에 청송 지역에서 새로운 청년 단체가 결성되었지만, 사회운동의 기반이 전반적으로 취약하여 다른 지역에 비해 단체의 수가 적었고 활동도 활발하지 않았다.

[의의와 평가]

일제강점기 청송 지역의 청년운동은 사회운동의 기반이 취약한 상황에서 지역민을 계몽하고 민족의식과 사회의식을 고취시키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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