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80066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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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趙亨道 |
영어공식명칭 | Cho Hyeongdo |
이칭/별칭 | 대이(大而),동계(東溪),청계도사(淸溪道士)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광우 |
출생 시기/일시 | 1567년 - 조형도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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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587년 - 조형도 정구 문하에서 수학 |
활동 시기/일시 | 1592년 - 조형도 임진왜란 창의 |
활동 시기/일시 | 1594년 - 조형도 무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594년 - 조형도 선전관 겸 비국랑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595년 - 조형도 청하현감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595년 - 조형도 경산현령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606년 - 조형도 고성현령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606년 - 조형도 고성현령 파직 |
활동 시기/일시 | 1608년 - 조형도 소모장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609년 - 조형도 의금부 압송 |
활동 시기/일시 | 1617년 - 조형도 삼도토포사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622년 - 조형도 동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부총관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623년 - 조형도 보성군수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627년 - 조형도 호소사 별장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627년 - 조형도 진주영장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627년 - 조형도 상주영장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627년 - 조형도 괴산군수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629년 - 조형도 경주영장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636년 - 조형도 병자호란 창의 |
몰년 시기/일시 | 1637년 - 조형도 사망 |
출생지 | 청송도호부 안덕리 -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 |
거주|이주지 | 청송도호부 - 경상북도 청송군 |
부임|활동지 | 청하현 - 경상북도 포항시 |
부임|활동지 | 경산현 - 경상북도 경산시 |
부임|활동지 | 고성현 - 경상남도 고성군 |
부임|활동지 | 전라남도 보성군 |
부임|활동지 | 경주영 - 경상북도 경주시 |
묘소|단소 | 총정 - 경상북도 경산시 와촌면 대한리 |
사당|배향지 | 덕봉사 -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 |
성격 | 무신 |
성별 | 남 |
본관 | 함안 |
대표 관직 | 경주영장 |
[정의]
조선 후기 청송 출신의 무신.
[개설]
조형도(趙亨道)[1567~1637]는 정구 문하에서 학문을 배우고 향시에 급제하였다. 임진왜란 때는 의병으로 참여하여 공을 세웠으며 무과에 급제하였다. 인조반정 때는 궁궐을 호위하여 공을 세우고 보성군수가 되었다.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임금을 공주까지 호위하였으며, 병자호란 때 청나라와의 화의를 주장하는 의견이 일어나자 분개하였다.
[가계]
본관은 함안(咸安). 자(字)는 대이(大而), 호(號)는 동계(東溪)·청계도사(淸溪道士).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조지(趙址), 어머니는 습독(習讀)을 지낸 권회(權恢)의 딸 증(贈) 정부인(貞夫人) 안동권씨(安東權氏)이며, 5형제 중 둘째이다. 형 조수도(趙守道)를 비롯해 동생 조순도(趙純道)·조준도(趙遵道)·조동도(趙東道)가 모두 현달하였다. 조형도는 만호(萬戶)를 지낸 큰아버지 조우(趙堣)와 허유(許裕)의 딸 김해허씨(金海許氏) 부부의 양자가 되었다. 할아버지는 부사직(副司直)을 지낸 조정언(趙庭彦), 증조할아버지는 의금부경력(義禁府經歷)을 지낸 조연(趙淵), 부인은 참의(參議)를 지낸 오운(吳澐)의 딸 정부인(貞夫人) 고창오씨(高敞吳氏)이다.
[활동 사항]
조형도는 1567년(명종 22) 경상도 청송도호부 안덕리(安德里)[지금의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에서 출생하였다. 처음에는 첨지중추부사를 지낸 민추(閔樞)에게 학문을 배웠다. 1587년(선조 20) 함안군수 정구(鄭逑)는 고을의 수재들을 선발하여 학문을 강론하였는데, 당시 함안군에 머무르고 있던 조형도가 매번 장원을 차지하였다. 이때의 인연으로 정구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우기 시작하였고, 그 후 여러 차례 향시(鄕試)에 급제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생 조동도와 함께 의병장 곽재우(郭再祐) 부대에 합류하여 공을 세웠고, 공훈으로 훈련원주부(訓鍊院主簿)에 임명되었다. 1594년(선조 27) 무과에 응시해 급제하였으며, 그해 겨울 선전관(宣傳官) 겸(兼) 비국랑(備局郞)이 되었다. 이때 유성룡(柳成龍)이 영의정의 자리에 있으면서 비변사(備邊司)를 책임지고 있었는데, 유성룡이 결재하는 많은 공문서를 막힘없이 처리하여 특별히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급하였다. 1595년 청하현감(淸河縣監)과 경산현령(慶山縣令)으로 부임하였다. 특히 조형도는 전란으로 피해가 극심하였던 경산현 지역을 복구하는 데 많은 힘을 기울였다. 1606년(선조 39) 고성현령(固城縣令)으로 부임하였지만 사간원의 탄핵으로 파직되었다. 1608년(선조 41) 창원대도호부 지역에 의병을 모으는 소모장(召募將)으로 파견되었다.
1609년(광해군 1) 중군(中軍) 김명윤(金命胤)의 참소를 받아 의금부로 압송되었다. 군졸을 수탈하고 포목(布木)을 함부로 징수하였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정광적(鄭光績)·김상용(金尙容) 등이 억울함을 변호해주어 곧 방면되었다. 1610년과 1611년 어머니 권씨와 양어머니 허씨가 차례로 세상을 떠나자 고향 청송으로 돌아와 동계정(東溪亭)을 짓고 머물렀다. 1614년(광해군 6)에는 정국 혼란을 이유로 다시 고향으로 내려왔다. 1617년(광해군 9) 재차 관직에 나아가게 되는데, 이해 삼도토포사(三道討捕使)에 임명되어 큰 도적 이경기(李景祺)를 사로잡았다. 1622년(광해군 14) 가선대부로 승급하여,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오위도총부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에 올랐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났을 때 조형도는 궁궐을 호위하였으며, 그 공으로 보성군수(寶城郡守)로 부임하였다. 재임 중 녹봉을 내어 향교를 수리하였고, 관찰사에게 청원하여 해창(海倉)에 체납한 세미(稅米)를 감면하는 등 많은 치적을 남겼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중군이 되어 임금을 공주(公州)까지 호종(扈從)하였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났을 때, 호소사(號召使) 장현광(張顯光)의 추천으로 별장(別將)이 되었다. 이해 영장(營將) 제도가 실시되면서 조형도는 진주영장(晉州營將)과 상주영장(尙州營將)으로 임명되었지만, 병으로 부임하지 않았다. 하지만 곧바로 괴산군수(槐山郡守)로 임명되어 사직소를 올렸으나 윤허받지 못하고 부임하였다. 1629년(인조 7) 경주영장(慶州營將)에 임명되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 청나라 군대가 남한산성을 포위하였다. 당시 조형도는 70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충청도관찰사 심연(沈演)의 진지에 합류하여 남한산성으로 진격하려 하였다. 하지만 길이 막혀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청나라와의 화의를 주장하는 의견이 여기저기서 일어나는 것을 듣고 분개한 나머지 등창에 걸려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문집으로 5권 3책의 『동계집(東溪集)』이 전한다.
[묘소]
경상북도 경산시 와촌면 대한리 총정(叢亭)에 묘소가 있다.
[상훈과 추모]
지금의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에 있던 덕봉사(德峯祠)에 조연·조함세(趙咸世)와 함께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