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8007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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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申禮男 |
영어공식명칭 | Shin Yenam |
이칭/별칭 | 문길(文吉)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상북도 청송군 진보면 합강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수환 |
출생 시기/일시 | 1557년 - 신예남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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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592년 - 신예남 청주목 오공촌으로 이거 |
몰년 시기/일시 | 1592년 - 신예남 사망 |
거주|이주지 | 경상도 진보현 합강리 - 경상북도 청송군 진보면 합강리 |
외가|처가 | 충청도 청주목 오공촌 -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오창읍 창리 |
사당|배향지 | 쌍절비각 - 경상북도 청송군 진보면 합강리 |
성격 | 학자 |
성별 | 남 |
본관 | 평산 |
대표 관직|경력 | 증(贈) 공조참판(工曹參判) |
[정의]
조선 전기 진보 출신의 학자.
[가계]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문길(文吉). 아버지는 상주목사(尙州牧使)를 지낸 신언(申漹), 어머니는 별제(別提)를 지낸 김제(金濟)의 딸 안동김씨(安東金氏)와 참봉(參奉)을 지낸 안택(安宅)의 딸 죽산안씨(竹山安氏), 할아버지는 호군(護軍)을 지낸 신종위(申從渭), 증조할아버지는 부사과(副司果)를 지낸 신권(申眷), 부인은 여절교위(勵節校尉) 민사건(閔思謇)의 딸 여흥민씨(驪興閔氏)이다.
[활동 사항]
신예남(申禮男)[1557~1592]은 김륵(金玏)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으며, 문학에 재주가 있었다. 하지만 과거 시험에는 여러 차례 낙방하였다. 1592년(선조 25) 처가가 있는 청주목(淸州牧) 오공촌(蜈蚣村)[지금의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오창읍 창리]에 우거(寓居)하였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신예남은 청주목을 공격해 온 일본군에게 사로잡혔다. 적들은 겁박과 회유로써 신예남을 굴복시키려고 했지만, 신예남은 끝내 거절하며 죽어서 이 나라의 귀신이 되고 말지 이역(異域)의 사람이 되지 않겠다는 혈서(血書)를 썼다. 그리고 노비(奴婢) 귀복(貴福)에게 혈서를 고향 진보현으로 가져가 선산(先山) 아래 제사 지내라는 명을 내린 후 자결하였다. 이를 본 적장이 신예남을 ‘진의인(眞義人)’이라고 애도했다고 한다. 한편, 이 소식을 들은 민씨 부인이 달려와 적들을 욕하니, 적들이 칼로 민씨 부인을 쳤다. 칼을 맞은 민씨 부인은 피를 흘리며 오랫동안 기절하였는데, 깬 후에는 진보현으로 돌아가 집안을 이끌었다고 한다.
[상훈과 추모]
선조(宣祖) 재위 연간[1567~1608] 공조참판에 증직(贈職)되었고, 민씨 부인은 정려(旌閭)를 받았다. 경상북도 청송군 진보면 합강리에 신예남 부부의 절개를 기리는 쌍절비각(雙節碑閣)이 건립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