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8007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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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基洙 |
영어공식명칭 | Kim Gisu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청송군 |
시대 | 근대/일제강점기 |
집필자 | 권영배 |
출생 시기/일시 | 1859년 - 김기수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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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 김기수 화목장터 3.1만세운동 주도 |
몰년 시기/일시 | 1925년 - 김기수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92년 - 김기수 대통령 표창 추서 |
관련 사건 시기/일시 | 1919년 3월 26일 - 화목장터 3.1독립만세운동 |
출생지 | 경상북도 청송군 현서면 구산리 |
거주|이주지 | 경상북도 청송군 현서면 구산리 |
활동지 | 경상북도 청송군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개신교 조사 |
[정의]
일제강점기 청송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김기수(金基洙)[1859~1925]는 1919년 3월 26일 청송군 현서면 화목장터 3.1독립만세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뒤 경찰에 잡혀 옥고를 치렀다.
[활동 사항]
김기수는 개신교 장로파 전도 조사(助師)로 전도 활동을 하던 중 서울에서 시작된 3.1독립만세운동이 경상북도 각 지역에서도 곧 일어날 것이라는 소문을 듣고 있었다. 1919년 3월 10일경 청송군 현서면 백자동(栢子洞)의 서당 훈장 이규백(李圭伯)으로부터 기독교인들과 지역 유지들을 비롯한 수백 명이 3월 23일경 현서면 화목장터에서 대규모로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킬 예정이며, 영천군 화북면 자천시장에서도 곧 만세운동이 일어날 계획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김기수는 청송에서도 만세 운동을 일으킬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고 앞장서서 나서기로 결심하였다. 김기수는 3월 17일 청송군 청송면 월막동(月幕洞)에서 한약방을 경영하는 윤보천(尹輔天)의 집으로 가서 전국 각지에서 전개되는 만세운동에 대해 언급하고, 이번 운동은 시기도 적절하여 우리나라가 독립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므로 군수 권병선(權丙宣) 등과도 만나 설득할 예정이라고 말하였다. 김기수는 표면적으로는 전도 활동을 하면서 실제로는 3.1독립만세운동의 분위기 조성에 적극 힘썼다.
마침내 1919년 3월 26일 청송군 현서면 화목장터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김기수는 오후 1시경 수백 명의 시위 군중의 선두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함께 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때 현서면 주재소 순사들이 급히 달려와 총검을 휘두르며 주동자들을 체포하고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김기수도 이러한 과정에서 체포되었고, 1919년 4월 2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8월을 언도받고 불복하여 항소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4월 24일 대구복심법원에 이어 같은 해 5월 19일 고등법원에서 각각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1992년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