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3002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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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天主敎迫害事件 |
영어의미역 | Event of Roman Catholicism Persecution in Sinnamugol Village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 연화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장영복 |
성격 | 천주교 신자 박해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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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시작)연도/일시 | 1815년 |
종결연도/일시 | 1868년 |
발생(시작)장소 | 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 연화리 신나무골 |
관련인물/단체 | 김현상|이선이|배도령 등 |
[정의]
조선 후기 칠곡 지역에 있었던 천주교 신자 박해 사건.
[개설]
조선 후기 천주교 전례는 봉건적 유교 도덕과 사회규범에 대항하는 사상적 반항, 이념적 도전이었다. 이에 조정에서 기본 질서를 부인하는 천주교 신자들을 박해한 사건이 있었는데 이를 천주교 박해 사건이라 한다. 조선 천주교 100년 박해 중 1815년(순조 15) 을해박해 때 성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인 순교자 김종한[안드레아]의 가정을 비롯하여, 청송의 노래산, 진보의 머루산, 영양의 일월산에 우거하던 천주교 신자들이 체포되어 대구 감영으로 이송되어 참형을 당할 때, 가족들이 옥바라지를 하기 위해 신나무골과 동명면 한티에 살게 되었고, 1827년 정해박해 이후 서울과 경기도, 충청도에서 피난 온 신자들이 신나무골로 와서 신자촌을 이루며 살았는데, 훗날 천주교 대구대교구가 움튼 요람지가 되었다.
[역사적 배경]
1849년부터 1861년까지 12년 동안 최양업 신부가 경상도 지방을 순회 전교할 때도 이곳 신나무골에 와서 성사를 주었으며, 이후 다블뤼 주교, 리델 신부도 성사를 주었다. 이로써 신나무골 신자촌은 지방의 신자와 외지에서 모인 신자들로서 당시 비교적 큰 신자촌을 이루었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신나무골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한티로 피난 갔다가 1868년 30여명이 순교하였다.
[목적]
당시 유교 도덕과 사회규범을 지키기 위해 조정에서 기본 질서를 부인하는 천주교 신자들을 박해한 행위로 조정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한 사건이다.
[발단]
천주교 신자들이 수많은 박해에도 굴하지 않고 신나무골과 한티에 모여 살면서 천주교 교리를 믿고 계속 유교 도덕과 사회규범을 대항하게 됨으로 인하여 발단되었다.
[결과]
103위 순교 성인 중 홍병주[베드로], 홍여주[바오로] 형제가 신나무골 회장직을 맡고 있다가 1839년 을해박해 때 서울 당고개에서 순교하였다. 1860년 경신박해 때는 인근의 칠곡읍 내에 살던 배정모 가정이 신나무골로 피난을 왔다가 얼마 후에 신나무골에도 포졸들이 들이 닥치자 다시 가족 다섯 명이 한티로 피신을 하였다. 그러나 뒤쫓아 온 포졸들에 의해서 사기굴에 숨어 있던 가족들이 밖으로 끌려 나와서 문초를 받았다. 부인 이선이[엘리사벳]와 장남 배도령[스테파노]은 끝까지 배교를 하지 않아 모자가 함께 순교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 때는 신나무골과 대구 인근의 신자들이 모두 더 깊은 산골인 한티로 피난을 갔다가 1868년 그곳에서 37명이 장렬하게 순교하였다.
[의의와 평가]
1977년부터 1, 2차에 걸쳐 성지로 개발하여, 순교자 묘소 이장, 첫 대구 본당 터 복원, 사제관, 신나무골 학당 등을 복원하여 연중 전국의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순례 행사로 순교 정신을 기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