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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300800
한자 大邱師範學校讀書會事件
영어의미역 Daegu Normal School Reading Club Event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북도 칠곡군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학생 비밀결사 운동
발생(시작)연도/일시 1940년 11월 23일연표보기

[정의]

일제강점기 대구사범학교에서 칠곡 출신의 장세파 등이 소속되어 활동한 항일 학생운동.

[개설]

대구사범학교에는 문예부, 연구부, 다혁당 등 3개의 비밀결사가 결성되어 학생운동이 전개되었으며 서로의 연관성을 가지면서도 독자적으로 움직였다. 이들 비밀결사는 학교 내·외에서 실력을 양성하여 독립을 준비하고자 한 학생 비밀결사였으며, 1940년대 학생운동의 대표적 조직이었다. 1940년 말에서 1941년 초에 대구사범학교를 중심으로 결성된 일제 말기 대표적인 학생 비밀결사 운동이었다.

[발단]

1939년 일제가 전시 동원 체제의 일환으로 ‘근로보국대’라는 이름하에 학생들에게 노동을 강요하였을 때 대구사범학교는 왜관(倭館)에서 경부선 철도의 복선 공사에 동원되었다. 일하는 도중 한일 학생 사이에 충돌이 일어났다. 이때 대구사범학교 학생들이 반일적 행동을 보이자 학교 당국은 관련 조선인 학생을 가려내 퇴학 및 정학 조치를 취했다. 사건이 계기가 나중에 대구사범학교의 학생 비밀결사가 만들어지는데 영향을 끼쳤다.

[경과]

대구사범학교에는 문예부, 연구회, 다혁당 등 3개의 비밀결사가 조직되어 서로 연관을 가지며 활동하였다. 먼저 문예부(文藝部)는 1940년 11월 23일 이태길의 하숙집에서 강두안, 박찬웅, 류홍수, 문홍의, 이동우, 김근배 등 8기생이 중심이 되어 결성되었다. 문예부의 결성에는 1938년부터 대구사범학교 심상과(尋常科)의 8, 9, 10기별로 민족성이 담긴 역사서나 문예작품을 비밀리에 읽고 토론하는 윤독회가 기반이 되었다. 문예부는 활동 방침으로 ‘첫째, 부원은 비밀을 엄수할 것, 둘째, 부원은 매주 토요일 각자가 쓴 작품을 가지고 참석하여 작품을 감상·비판하고 서로 의견을 교환할 것’ 등을 결정하였다. 그리고 문예부에서는 기관지로 『반딧불』을 발행하였다.

연구회(硏究會)는 1941년 1월 23일 8기생을 중심으로 결성되었으며 이무영의 하숙집에서 칠곡군 약목 출신의 장세파를 비롯해 이태길, 안진강, 김영복, 이무영, 최낙철, 강두안, 윤덕섭 등 9명을 중심으로 결성되었다. 2월에 오용수, 이원호, 윤영석, 박제민이, 3월에 양명복이 계속 가입하였다. 1940년 9월에 대구사범학교 심상과 8기생 70여 명이 남산동에 위치한 충령탑에 모여 1939년에 있었던 왜관사건을 계승하여 학생운동을 전개할 것을 논의하였다. 그 후 11월에 조직을 만들기 위한 조율에 들어갔으며 겨울 방학을 마치고 개학하는 즉시로 조직체를 결성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3학기가 시작된 1월 23일에 연구회가 조직되었던 것이다.

연구회가 결성되던 자리에서 칠곡 약목 출신의 장세파는 일제의 전쟁 확대는 세계대전을 초래할 것이며 서방의 생산력과 군사력을 일제가 감당할 수 없을 것이므로 필연적으로 패망하고, 그 결과 조선의 독립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전망하였다. 참석자들은 장세파의 전망에 동의하고 비밀결사를 만들기로 뜻을 같이 하였다. 비밀결사는 표면적으로는 학술 연구를 표방하였는데, 실천 방안으로 자신의 학문 분야의 연구를 심화시켜 실력을 양성하고 해당 분야에서 조선의 최고권위자가 되어 조선의 독립을 위해 매진한다는 운동 방침을 정하였다. 담당 부서는 참여자의 전공을 부서로 정하였다. 교육부 임병찬, 공업부 겸 사무원 장세파, 문학부 이태길, 종교부 안진강, 이과부 및 사무원 김영복, 전기과학부 이무영, 지리부 최낙철, 문예부 강두안, 수학부 윤덕섭, 물리부 윤영석, 역사부 이원호, 정치경제부 오용수, 농업부 박제민, 음악부 양명복 등이었다.

연구회의 활동을 보면 재학 중의 활동과 졸업 후의 활동으로 구분할 수 있다. 우선 재학 중의 활동은 연구 발표회, 천재교육의 준비, 민족의식 고취와 동지 규합 등이었다. 졸업 후의 활동은 의성군 안평국민학교에 부임한 장세파, 충북 영동군 황간 남성국민학교에 부임한 오용수, 함북 나진시 약초국민학교에 부임한 최낙철, 강원도 영월금공립국민학교에 부임한 이태길 등이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여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다혁당(茶革黨)은 1941년 2월 15일에 칠곡 인동 출신의 권쾌복을 비롯해 최영백, 김효식, 김성권, 이도혁, 문덕길, 최태석, 배학보, 이종악, 서진구, 이주호, 박호준, 이홍빈 등 9기생이 주축이 되어 결성하였다. 다혁당은 1939년 8월에 9기생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된 백의단(白衣團)을 1941년 2월 15일에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조직한 것이었다. 백의단은 1939년 왜관사건때 권쾌복, 배학보, 조강제, 최영백, 문덕길, 김성권, 최태석 등 20여명의 학생들이 왜관국민학교낙동강 백사장에서 결성한 비밀결사였다. 권쾌복을 비롯해 이들은 당시 그 자리에서 7기생이 일으킨 왜관사건의 진상 조사와 그 대책 수립을 논의하였고, 향후 곧바로 직접 행동을 실천에 옮기자는 의견과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운동을 지속적으로 펼치기 위해 비밀결사를 조직하자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결국 학생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기로 하고 이름을 백의단이라 정했다. 이후 백의단은 1년 6개월 동안 독서 활동, 문화 운동 등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다혁당이라는 비밀결사의 이름은 이홍빈의 제안으로 결정하였는데, 그의미는 영웅은 ‘다색’을 좋아한다는 것에서 ‘다’를 빌리고, ‘혁’은 혁명을 뜻하였다. 다혁당은 표면상으로는 문예의 창작, 학술의 연구, 사람다운 사람 등으로 표방하였으나 학술을 통하여 민족 독립의 역량을 확대시켜 독립을 쟁취하고자 하였다. 다혁당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당원의 규약을 정하였다. 첫째, 당원은 비밀을 엄수한다. 둘째 당원은 매월 2회 회합하고 당수, 부당수 및 각 부장은 매주 1회 이상 회합한다. 셋째 당원은 당수의 명령에 절대 복종한다. 넷째 정당원은 결단식에 참가한 자에 한 한다 등이었다. 다혁당의 조직으로 당수(배학보) 아래에 총무부(최영백), 문예부(이동우), 예술부(권쾌복), 운동부(이도혁) 등 4개 부서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4개 부서 아래에 각 분야별 책임자를 두었다.

다혁당의 활동을 보면 우선 우리글로 된 역사 문화 서적을 읽고 토론회를 개최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고자 하였다. 둘째, 군사적 행동을 취할 때를 대비하여 군사훈련을 실시하고자 하였다. 셋째, 축구 등 운동을 통하여 학교 간의 교류를 실시하고 이를 기반으로 하여 민족의식을 공유하고자 하였다. 넷째, 방학을 이용하여 각자의 고향에 야학을 개설하고 문맹퇴치와 우리글과 우리 문화 보급에 노력하였다. 다섯째, 하급생을 지도하여 민족의식을 지속적으로 가질 수 있도록 활동하였다.

다혁당은 1941년 여름 충남 홍성에서 교사로 근무하던 8기생 정현(鄭鉉)이 갖고 있던 『반딧불』이 일제 경찰에 발각되면서 와해되었다. 이때부터 약 2년 동안 검찰 조사를 받았으며 1943년 2월 8일에 예심이 종결되었다. 1943년 12월의 최종 판결에서는 35명에게 5년에서 2년 6개월의 실형이 언도되었다. 그 가운데 박제민, 강두안, 박찬웅, 장세파, 서진구 등 5명은 해방을 맞이하지 못하고 옥중에서 사망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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