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3008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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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申益愰神道碑 |
영어의미역 | Memorial Stone for Sin Ikhwang in Bokseong-ri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경상북도 칠곡군 약목면 신유로 62-3[복성리 1137]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장희흥 |
성격 | 금석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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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식 | 이수형 |
건립시기/일시 | 조선 후기 |
관련인물 | 신익황 |
재질 | 화강암 |
높이 | 이수 70㎝, 비신 175㎝, 귀부 30㎝ |
너비 | 이수 105×60㎝, 비신 66×35㎝, 귀부 155×110㎝ |
소재지 주소 | 경상북도 칠곡군 약목면 신유로 62-3[복성리 1137][양지말] |
[정의]
경상북도 칠곡군 약목면 복성리에 있는 조선 후기 성리학자 신익황의 신도비.
[개설]
칠곡군 약목면 복성리에 있는 조선 후기에 세워진 성리학자 신익황의 신도비이다. 신익황(申益愰)[1672~1722]의 자는 명중(明仲), 호는 극재(克齋)이며 본관은 평산(平山)으로 장절공 신숭겸(申崇謙)의 후예로써 성리학자이다. 21세에 향시에 합격한 뒤에는 과거를 단념하고 학문에만 전념하였으며, 학덕으로 참봉·주부 등에 천거되었으나 번번이 사퇴하였고 사창 제도를 창설하였다.
학문에 뜻을 두고 경전 등에 통달하였으며 이기설(理氣說)을 연구하였다. 신익황의 학문은 이현일(李玄逸)의 영향을 받았는데, 그 이전에는 이황(李滉)의 설보다는 이이(李珥)의 설에 기울어져 있었으나 이현일과의 학문적 교류를 통하여 확연히 이이를 버리고 이황의 이기분개(理氣分開)의 입장에서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찬성하였다. 사망 이후 1765년(영조 41) 사헌부대사헌이 추증되었고, 1784년(정조 8) 위패가 곤산서원(崑山書院)에 봉안되었다. 약목면 복성리에 공부하던 동락당(同樂堂)과 제사를 지내는 극재사당(克齋祠堂)이 있다. 문집으로는 『극재집(克齋集)』 등이 있다.
[건립 경위]
신도비는 신익황 사후 평산신씨 문중에서 극재 신익황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된 것으로 비문은 이상정이 지었다.
[위치]
경상북도 칠곡군 약목면 신유로 62-3[복성리 1137번지]에 있다.
[형태]
해학적인 모양의 귀부, 오석으로 만든 비신, 원형 모양의 이수로 구성되어 있다. 재질은 화강암으로 이수의 높이는 70㎝, 너비는 105×60㎝, 비신의 높이는 175㎝, 너비는 66×35㎝, 귀부의 높이는 30㎝이며 너비는 155×110㎝이다.
[금석문]
신도비에는 전면에는 “克齋申先生神道碑銘”이라고 되어 있다.
[현황]
복성리 약목 초등학교 남쪽의 추원재 우측에 위치하고 있다. 배치는 방형의 돌담 안에 비석 1기가 있으며, 다른 1기는 수년 전에 세운 비석이다.
[의의와 평가]
조선 후기 칠곡 지역의 재지사족과 성리학자의 현황을 파악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