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9004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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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忠州牧 |
영어의미역 | Chungjumok Administrative District |
이칭/별칭 | 대원,예성,국원경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 |
지역 | 충청북도 충주시 |
시대 | 고려/고려 |
집필자 | 이창훈 |
[정의]
고려시대 충청북도 충주 지역에 있었던 지방 행정구역.
[개설]
현재 충청북도 충주 지역은 신라의 중원경에서 고려 940년(태조 23년) 충주(忠州)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충주라는 이름은 이때부터 사용되기 시작하는데, 983년(성종 2년)에 전국에 12목(牧)을 설치하면서 처음으로 이곳에 목(牧)이 설치되었다. 이후 고려의 지방제도 개편에 따라 부분적으로 행정 단위의 명칭이 변경되기도 하였으나, 대부분의 시기에 충주목이라는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고, 그 위상은 조선시대에도 이어졌다.
[제정경위 및 목적]
지방제도에서 목(牧)이란 고려와 조선에서 사용된 하나의 행정구역이다. 고려 983년(성종 2년) 최승로(崔承老)의 건의에 의해 전국에 12주목(州牧)을 설치하고 지방관을 파견한 것이 처음이며, 이때 충주에도 목이 설치되었다. 목은 각 지역의 거점에 설치하여 지방 행정의 중심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군·현 등의 다른 행정 단위보다 우위에 있었다.
충주에 목이 설치된 이유도 전통적인 교통의 요충지라는 점에서 중요시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목은 조선시대에도 유지되다 1895년(고종 23) 전국을 23부(府) 336군(郡)으로 재편하는 지방제도 개정으로 그 명칭이 사라지게 되었다.
[관련기록]
충주목에 관한 기록은 『고려사(高麗史)』지리지에 비교적 상세히 전하고 있고, 이후 편찬된 다른 기록도 대체로 『고려사』의 내용을 따르고 있기 때문에 『고려사』지리지의 충주목에 관한 내용을 모두 소개하도록 한다.
“충주목(忠州牧)은 원래 고구려의 국원성(國原城)[미을성 또는 완장성이라고도 한다]인데 신라가 탈취하였으며, 진흥왕(眞興王)은 소경(小京)을 두었고, 경덕왕은 중원경(中原京)으로 고쳤다. 태조 23년에 또 충주로 고쳤다. 성종 2년에 처음으로 전국에 12개의 목을 설치했을 때 이 주는 그 중의 하나로 되었다.
14년에 12개 주에 절도사를 두면서 본 주는 창화군(昌化軍)이라고 이름을 지었으며, 중원도(中原道)라고 불렀다. 현종 3년에 이를 폐지하여 안무사로 되었고, 9년에 목으로 정해졌는 바 8개 목 중의 하나로 되었으며, 1254년(고종 41년)에 국원경(國原京)으로 승격시켰다.
양진명소(楊津溟所)와 양진연소(楊津衍所)가 있으며, 대원(大原)[성종이 정한 명칭이다] 또는 예성(蘂城)[1255년에 다인철소 사람이 몽고 침략군을 방어함에 공로가 있었다고 하여 익안현으로 승격시켰다]라고도 부르며 본 목에 소속된 군이 1개, 현이 5개, 영지사군(領知事郡)이 1개 있다.”
[변천]
983년(성종 2) 전국에 12목이 설치되면서 충주목으로 승격되었다. 995년(성종 14) 지방을 10도(道)12절도사(節度使) 체제로 개편할 때, 창화군(昌化軍)으로 명칭을 바꾸고 절도사를 파견하여 중원도(中原道)에 속하게 했다. 1012년(현종 3)에는 절도사가 안무사(安撫使)로 바뀌었으며, 1018년(현종 9) 전국에 8목이 설치될 때 다시 충주목이 되었다.
고려 중기에 5도·양계의 지방제도가 확립되면서 양광도(楊廣道)에 속했고, 괴주(槐州)·장연현(長延縣)·음성현(陰城縣)·청풍현(淸風縣) 등을 속현으로 거느렸다. 1254년(고종 41) 몽고군과의 전투에서 크게 이겼기 때문에 국원경(國原京)으로 승격되었다가, 다시 목으로 환원되었다.
목으로 환원된 시점은 정확히 확인하기 어렵지만, 1310년(충선왕 2) 9월 을유일에 대규모 인사를 단행하면서 “김륜(金倫)을 검교 평리 충주목사”로 임명하였던 사실로 미루어 적어도 이 시기에는 다시 충주목이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고, 이후 고려 후기까지 지속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