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9007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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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忠州見鶴里土城 |
영어의미역 | Chungju Gyeonhak-ri Toseong Fortress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충청북도 충주시 주덕읍 견학리 441 일원 |
시대 | 고대/고대 |
집필자 | 백종오 |
[정의]
충청북도 충주시 신니면 견학리에 있는 삼국시대 판축 토성.
[개설]
충주 견학리 토성은 낮은 구릉지역의 끝자락에 축초된 토축성으로 규모가 작은 판축 공법이 적용되었다. 1991년과 2000년 충북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2차례에 걸쳐 발굴조사 되었으며, 이를 통해 9세기를 전후한 시기의 특징적인 양상이 확인되었다. 또한 청동기시대의 문화층과 초기 철기시대와 원삼국시기에서 삼국시대에 걸친 유물이 출토되어 오랫동안의 생활 터전이었음이 밝혀졌다.
[건립경위]
충주 견학리 토성에서 출토된 유물은 9세기를 전후한 시기의 특징적인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이 시기는 전국적으로 호족이 발생하던 시기로 견학리 토성의 건립 배경 역시 충주 일대를 근거지로 하여 발호한 호족과 관련이 깊을 것으로 여겨진다.
[위치]
충주 견학리 토성은 충주시 신니면 견학리의 성밑마을 서쪽에 위치한다. 이곳은 서쪽의 가섭산에서 뻗어 내린 낮은 구릉들 가운데 하나인 해발 110m 가량의 구릉 끝자락으로 동쪽으로는 요도천과 그 연변의 들판이 펼쳐져 있다. 이곳과 인접하여 현재 충주에서 서울을 잇는 국도 3호선이 지나고 있으며, 고려시대에는 22개 역도 중의 하나인 경주도(慶州道)가 지나는 길목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교통로를 중심으로 견학리 토성 주변에는 신라시대와 고려시대에 걸친 고분군과 충주 숭선사지·원평리 사지 등의 불교유적 및 야철유적 등이 밀집되어 있어 주목된다.
[형태]
충주 견학리 토성은 공장 신축 과정에서 서벽이 유실되어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방형의 평면 형태로 추정되며, 성벽 바깥에는 해자와 도랑 등의 시설을 두었다. 동벽과 북벽은 경사면을 이용하여 축조하고 밖에는 도랑을 돌렸으며, 남벽은 평탄한 지형 밖에 해자를 조성하면서 이곳에서 나온 흙으로 판축하였다. 성벽의 내외에는 토축이 밀리지 않도록 아랫부분을 보강하였다.
[현황]
충주 견학리 토성은 낮은 구릉지역의 선단부에 축조된 규모가 토성으로 공장 신축과정에서 서벽이 유실되었다. 성벽은 북벽이 26m, 동벽이 58m, 남벽이 17m로 전체적으로 97m 가량이 남아 있으며, 성벽의 높이는 바깥에서 약 5m~5.5m, 성내에서는 최고 2m 정도이다.
두 차례에 걸친 발굴조사를 통해 토성에 관한 자세한 내용을 파악하게 되었다. 1991년 공장 신축에 따른 긴급조사에서는 성벽의 전체 규모와 함께 성벽 등이 조사되었다. 성벽은 북쪽 성벽 문지에서 5.4m의 너비를 가진 것으로 조사되었고, 직경 50㎝의 기둥구덩이 2.5m 간격으로 3개가 확인되었으며, 이보다 안쪽으로 좁혀 너비 3.6m의 적심이 조사되었다.
이 밖에 배수로, 성벽 바깥의 도랑, 타원형 유구와 기둥구덩, 화덕자리 등이 조사되었으나 대부분 심하게 교란되어 정확한 양상을 파악할 수 없었다. 그러나 외날돌도끼와 민무늬토기조각 등이 출토되어 청동기시대의 문화층이 일부 존재함이 밝혀졌고, 성벽에서 판축층에서 니질(泥質)의 연질토기편이 발견되었다.
경질 회청색의 반구병을 비롯한 자배기와 횡파수가 달린 연질토기, 돌대가 있는 다수의 격자문 토기편, 주름무늬 경질토기 병 등이 출토됨으로써 1차적인 판축은 삼국시대까지 소급될 가능성이 제시되었으며, 2차 수축이 통일신라 중기 이후에 이루어졌고, 고려시대 이후에 폐성되었을 것으로 판단되었다.
2000년 2차 조사에서는 남쪽의 성벽이 후대의 것으로 밝혀졌으며, 이에 따라 바깥으로 축조된 판축 성벽은 해자까지 메워서 경작지가 되었음이 확인되었다. 즉, 토성의 성벽은 기본적으로 바깥에 해자를 만들었는데, 북쪽과 동쪽의 경우는 자연 경사면을 이용하였고, 남벽은 평탄지에 축조하였음이 명백해졌다.
판축은 상하 2개로 나뉘는데, 아래는 회갈색 점질토 위에 적색 점질토를 수평으로 깔아 만든 기반다짐이며, 층위가 두껍다. 위로는 적갈색과 명갈색의 점질토를 교타 판축하여 층위가 구분되는데 적갈색 사질토로 마무리하였으며, 중간 중간 할석이 포함된 경우도 확인되었다. 판축은 대체로 5~10㎝ 간격을 이루며 수평으로 쌓았으며, 아래로 갈수록 점성과 밀도가 높아 단단하다.
성벽 밖의 해자는 깊이 1.5m로 생토층을 파내어 조성하였다. 남벽은 축조할 때 기둥구덩을 파고 축조하였으며, 안쪽으로 석렬을 둔 배수로를 인위적으로 조성하였다. 기둥구덩의 간격은 3.3m 간격으로, 위에 작은 돌들이 성벽을 향하여 기울어진 채 박혀 있었다. 성벽 안쪽의 배수구 홈은 판상석을 세워 U자형으로 만들었는데 숯과 뻘로 채워져 있었다.
성 내부의 건물터는 모두 할석을 이용하였는데, 모두 8~9세기의 특징적인 유물이 출토되어 최종 경영시기를 판단할 수 있게 되었다. 상한 연대 역시 판축 다짐층에서 나오는 토기편으로 보아 경영 연대와 큰 차이가 없었던 것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한편, 성내에서는 기와가 전혀 출토되지 않아 토성이 경영될 당시 성내에 기와를 얹은 건물이 세워지지 않았던 것으로 밝혀졌는데, 이는 형태나 입지면에서 유사한 용인의 처인성(處仁城)에서 막새기와를 사용한 점과 대조적인 것이다. 출토유물은 보습·도끼·재갈 등의 철기류와 토기류가 대부분인데 이밖에 사암 계통의 숫돌 조각도 여러 점 출토되었다.
[의의와 평가]
충주 견학리 토성은 9세기를 중심으로 한 신라 후기의 사회상을 살필 수 있는 유적으로서 역사적 가치가 높다. 특히 단일 시기에 축조되고 사용된 점에서 당시 시대상을 파악하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충주 지역이 국원소경에서 중원경으로 된 어느 시점, 즉 고대 말기에서 중세 초기로 발전하는 시기의 지방문화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 토성을 대표할 수 있는 문화유적으로 여겨진다. 2006년 1월 6일 충청북도 기념물 제137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충청북도 기념물로 재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