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9012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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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東學農民運動 |
영어의미역 | Donghak Peasant Movement |
이칭/별칭 | 갑오농민전쟁,동학운동,동학혁명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충청북도 충주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배항섭 |
[정의]
1894년(고종 31) 4월 초부터 약 6개월 동안 충청북도 충주 지역에서 전개된 항일 농민운동.
[개설]
동학농민운동은 1894년 전라도 고부의 동학 접주(接主) 전봉준 등을 지도자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교조의 신원과 외세를 물리칠 목적으로 일으킨 농민운동이다.
[역사적 배경]
충청북도 지역은 동학농민운동의 전개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무엇보다 충청북도는 1893년 3월 동학농민운동의 전사를 이루는 보은 집회가 개최된 곳이다. 보은 집회는 선무사 어윤중의 활동과 정부의 강력한 대응에 따라 4월 초순에 해산되었으나, 이후 동학농민운동 전개에서 큰 영향을 주었다.
보은 집회는 교조의 신원이나 포교의 자유라는 종교적 구호보다는 보국안민(輔國安民)과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 구호가 전면에 제시되었으며, 수만 명이 모인 대규모 집회로서, 한 달여 전에 벌인 복합상소에 이어 국왕에게 직접 자신들의 뜻을 전달하고자 열린 집회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이 점에서 보은 집회는 민란의 범위를 벗어나 전국적인 차원에서 계층과 신분을 뛰어넘는 다양한 세력의 결집을 추구하였고, 반외세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했으며, 국왕을 직접적인 협상 당사자로 삼고자 하였다. 그 과정에서 보국안민을 목표로 한 변혁 지향 세력의 한 발 앞선 정치의식이 대중들에게 전파될 수 있었다는 점 등에서 이듬해 일어난 동학농민운동의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는 획기적인 의미를 가진다.
[경과]
1893년 4월 초 보은 집회가 끝난 뒤 동학교도들의 움직임은 더욱 활발해졌다. 충주와 청주 부근에 동학교도들이 다시 모인다는 소문이 무성하였다. 7월에는 동학교도들이 충주에서 모여 서울로 올라간다는 소문이 들리기도 하였다. 보은 집회의 목적을 이루지는 못하였지만 거기서 분출된 열기는 잦아들지 않고 곳곳에 도사리고 있었다.
1894년 3월 20일 전라도 무장에서 남접을 중심으로 한 농민군이 봉기하자 동학교단에서는 도금찰(都禁察)을 정해 포(包)를 단속하였고, 여러 차례의 통유문과 계칙문을 돌려 교도들을 통제하였다. 충청도의 농민군이 호응하거나 합세하는 것을 막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이미 무장 기포 직후부터 서장옥과 황하일 등 남접과 기맥이 통하던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전라도 농민군에 호응하였으며, 충청북도 지역의 일부 농민군은 전라도로 내려가 합류하기도 하였다.
황간·영동·청산·보은·옥천 등지에서는 이미 3월 22일 무렵부터 농민군들의 움직임이 활발해져서 사대부들 가운데는 구타를 당하는 자도 나왔고, 그를 피해 피난하는 자들도 속출하였다. 4월 초순에는 괴산과 연풍 등지에서도 동학교도들이 일어나 그 동안 토호들이 빼앗아 간 재물을 환수하였으며, 토호들을 때리거나 거세를 하기도 하였다.
4월 초까지 충주 인근 지역에서 농민군의 활동이 가시화한 곳은 황간·영동·청산·보은·옥천·진잠·문의·괴산·연풍 등이었으며, 곳곳에서 사대부들이 공격을 당하거나 재물을 빼앗겼다. 농민군은 부당하게 착취한 관곡과 부자들의 재물을 빼앗아 빈민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했다. 농민군이 지향한 사회적 평등주의와 경제적 균산주의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충청도 농민군 일부가 무리를 지어 호남 지방으로 내려가 농민군 주력 부대와 합류하기도 하였으나, 충청도 농민군은 자신들을 이끌 확실한 지도부가 없는데다 공주감영과 청주병영에 소속된 관군의 군사 활동에 위축되어 4월 중순 이후 대부분 일단 해산하였다. 이에 따라 5월에서 6월 사이 충청도 농민군의 활동은 상대적인 소강 상태를 맞는다.
한편, 동학농민군이 전라도 일대와 충청도 곳곳에서 잇달아 봉기하자 정부에서는 4월 30일 청나라에 지원병을 요청하여 5월 초 청군이 아산만에 도착하였다. 일본도 제물포조약을 내세워 5월 12일까지 4,300여 명의 일본군이 인천에 상륙함으로써 결국 청일전쟁이 발발하였다. 충청도 일대는 청일전쟁의 최초의 전장이 되었고, 청나라의 패배와 일본의 승리 소식이 가장 먼저 알려진 곳이다. 또 청나라와 일본의 출병과 청일전쟁의 여파로 어느 지역 보다 먼저, 그리고 직접적으로 피해를 입었던 곳이다.
이러한 사정은 일본군의 경복궁 침입과 함께 충청도 농민군의 일본에 대한 위기감을 일찍부터 첨예하게 만들었고, 이에 따라 충청도 지역에서는 이미 6월 말부터 척왜 운동의 움직임이 활발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이 시기 전라도 농민군이 본격적인 집강소 체제로 막 들어가며 중앙 정국의 추이에 대해 상대적으로 관망하는 입장에 있던 점과 대조된다.
충주에서도 동학농민군이 결성되었다. 7월 14일 1,000여 명의 동학농민군이 모여 “앞으로 왜놈이 도처에 가득 찰 것이다”라고 하며 부근의 동네마다 다니며 곳곳에 보루를 쌓았다고 전한다. 7월 중순 무렵부터는 여러 마을을 다니며 군기와 군량을 빼앗았고, 7월 23일경에는 본격적으로 폐정 개혁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와 같이 7월에는 충청도 전역이 사실상 기포 단계로 들어갈 정도로 농민군의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8월 이후에는 교단을 지지하는 접주들과 교단의 입장을 반대하는 접주들 간에 물리적인 충돌이 일어나기도 했다.
1894년 9월 이후 일본군을 상대로 거족적인 항일 의병 운동이 전개될 때 충청북도 지역에서는 크고 작은 전투가 수없이 벌어졌으며, 12월 17일에 있었던 보은 북실 전투는 큰 규모의 마지막 전투였다. 충주 일대의 동학 조직도 청일전쟁과 일본군의 경복궁 기습 사건이 일어난 직후 재봉기를 준비하기 시작하여, 북접 교단의 기포령이 떨어진 9월 18일 이후에 일제히 기포하였다.
북접 농민군은 기포와 동시에 관군과 민보군 그리고 일본군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양호도순무영이 설치되었고, 일본도 후비보병(後備步兵) 제19대대 병력을 증파하였다. 대대 본부가 포함된 중로군은 청주를 목표로 내려왔다.
[결과]
충청도, 경상도, 강원도, 경기도에서 보은으로 집결한 북접 농민군은 분산하여 영동과 황간에 주둔하였다. 최시형은 북접 농민군을 총지휘하는 통령으로 손병희를 지명하였다. 이어 손병희의 북접 농민군과 전봉준의 남접 농민군이 논산에서 만남으로써 남접과 북접의 동학농민군 연합이 이루어졌다.
충주와 단양 일대의 동학 조직은 관동포(關東包)와 충의포(忠義包)가 중심이었다. 기포령 이후 대접주 손병희의 충의포는 황산(지금의 논산)에 집결하였고, 충주의 신재련 포는 보평(洑坪)[지금의 음성군 금왕읍 도청리·신평리 일대]에 주둔하였다. 이 부대가 보은으로 남하하는 과정에 괴산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서 승리를 하였는데, 일본군과 싸워서 승리한 드문 전투 중 하나였다.
[의의와 평가]
동학농민군운동은 한때 관군을 무찌르고 삼남 지방을 휩쓸었으나, 결국 청나라와 일본의 개입으로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동학농민운동은 후에 항일 의병 투쟁과 3·1운동으로 계승되었다. 특히 충청북도는 동학농민운동의 중심 지역으로, 동학농민운동은 충청북도에서 시작하여 충청북도에서 끝났다고 하여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