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9012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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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同樂里戰鬪 |
영어의미역 | Dongrak-ri Battle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충청북도 충주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송병권 |
성격 | 근대전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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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시작)연도/일시 | 1950년 7월 4일 |
종결연도/일시 | 1950년 7월 7일 |
발생(시작)장소 | 충주 무극리 감우재 동락리 일대 |
관련인물/단체 | 국군 제7연대|인민군 제48연대 |
[정의]
6·25 전쟁 중인 1950년 7월 4일부터 7일까지 충청북도 충주 지역 일대에서 벌어진 국군과 북한군 간의 전투.
[개설]
동락리 전투는 6·25전쟁 초기 후퇴를 거듭하던 중 국군 제6사단 제7연대가 1950년 7월 4일부터 7일까지 장호원에서 음성에 이르는 무극리 감우재 동락리 일대에서 북한군 제15사단을 상대로 1개 연대 이상 규모를 궤멸시킨 전과를 올린 한국전쟁 중 국군의 첫 번째 승리를 거둔 전투이다.
[발단]
7월 4일 9시 충주중학교를 출발한 제6사단 제7연대 제2대대(대대장 소령 김종수)는 저녁 때 신덕저수지에 이르러 진지를 점령했다. 제7연대장 임부택 중령은 음성 방어가 긴급하다고 판단하여 제1대대는 무극리로 진출시키고, 제2대대는 음성으로 이동시켜 사정고개 일대에 배치하였으며, 제3대대는 생극을 향하여 전진했다.
7월 6일 북한군 제48연대는 “국군이 차를 타고 도망쳤다.”는 동락리 주민의 말을 듣고, 또 신양리까지 수색한 결과 국군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안심한 듯 동락리에 진출한 야포의 엄호 아래 신양리를 경유하여 음성으로 진출하려 했다. 그래서 야음을 이용하여 주력부대가 차량으로 생극을 출발하여 7월 7일 5시경 동락리를 통과하고 있었다.
[경과]
1950년 7월 7일 동락리를 통과할 무렵, 국군 7연대 제3대대장은 공격 명령을 내렸다. 제3대대 9중대는 북한군 차량대열 선두를 공격하였다. 북한군의 이동대열 첨병중대가 교전에 들어가자 국군 제3대대가 있는 310고지 정면에 적군이 밀집대형으로 정지하였다. 이에 제3대대가 북한군의 측면을 공격하자 적은 크게 당황하여 혼란에 빠졌다.
한편 7월 6일 15시 부용산을 점령하라는 연대장의 명령을 받은 제2대대는 가섭산 북쪽의 644고지를 점령했다. 7월 7일 5시경 동락리 앞 도로에 수십 대의 차량이 병력을 가득 태운 채 서 있는 것을 본 제2대대는 고지 아래로 신속히 내려가 6시에 공격을 개시했다. 기습공격을 받은 북한군은 도주했다.
동락초등학교 교정에서 국군 제3대대 방향으로 사격하던 적의 야포가 제2대대 쪽으로 포구를 돌리고 있었다. 제2대대는 81㎜ 박격포 1문으로 사격을 개시하여 북한군의 포진지를 파괴하였고, 야적된 포탄상자도 연쇄 폭발시켰다. 제2대대는 북한군의 저항이 거의 없이 잔적을 소탕했다.
[결과]
동락리전투에서 국군은 인명사살 2,186명, 포로 132명, 122㎜곡사포 6문, 76㎜박격포 18문, 구경50 기관총 6정, 중기관총 12정, 경기관총 14정, 자동소총 37정 소총 919정, 장갑차 4대, 2 1/2톤 트럭 60대, 1/4톤 짚차 15대, 사이드카 7대, 무전기 4대, 전화기 12대, 말 24필과 상당량의 탄약 등을 노획했다. 이에 비해 국군의 손실은 전사 9명, 부상 53명뿐이었다.
노획장비는 대전에서 국민에게 전시함으로써 국군의 승리를 국민에게 널리 알렸다. 노획품은 소련 제품의 표시가 있어 소련이 6·25전쟁에 개입했다는 증거로 유엔에 보내졌다. 승전 보고를 받은 이승만 대통령은 제7연대 전 장병에게 1계급 특진의 영예를 주었고 격려금 50만 원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