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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규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901472
한자 白南奎
영어음역 BaEk Namgyu
이칭/별칭 운암(雲庵)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충청북도 충주시 금가면 월상리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구완회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의병장|독립운동가
출신지 충청북도 충주시 금가면 월상리
성별
생년 1884년연표보기
몰년 1970년연표보기
본관 수원
대표경력 이강년 의병부대 우선봉장

[정의]

충청북도 충주 출신의 의병장이자 독립운동가.

[개설]

본관은 수원(水原). 호는 운암(雲庵). 증조할아버지는 백후진(白厚鎭)의 증손이며, 할아버지는 백명수(白命洙)이다. 아버지 백낙성(白樂成), 어머니 여양진씨(驪陽陳氏) 진성임(陳聖任)이다.

[활동사항]

백남규는 대한제국 무관학교를 졸업한 후 안동진위대 부위(副尉)로 근무했다. 1907년 여름의 군대해산 이후에 동지를 규합하여 경상북도 순흥(順興)에서 의병을 일으켜 부하 800명을 거느리고 왜병과 접전했다. 당시 문경의병진의 이강년(李康秊)이 강원도 횡성의 봉복사(鳳腹寺)에 군사를 주둔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 그와 합진할 것을 결의하고 의병진의 우선봉(右先鋒)으로 임명되었다.

제천의 천남전투, 문경의 갈평전투, 영월전투, 원주의 싸리재전투 등에서 용맹을 떨쳤다. 12월 중순에 이강년 부대가 단양의 복상골전투에서 패하고 북상한 이후에도 소백산 일대의 근거지에 남아서 소규모 의병활동을 지속하였다. 이듬해 이강년 부대가 다시 남하하자 합류하여 영남 북부의 서벽, 재산 등에서 일본군과 싸워 공을 세웠다.

이강년이 청풍에서 체포되고 호좌의병진이 붕괴되자 독자적인 활동을 지속하다가 1909년 12월에 체포되어 10년 형을 선고받고 8년간에 걸친 옥살이를 하였다. 특사로 풀려난 후 중국의 상해로 가려고 하다가 1917년 2월에 음성 개화실에서 재차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무기형으로 감형되었으며 이후 15년간 옥살이를 하였다. 광복 직후에는 김구(金九)와 뜻을 같이하면서 이승만(李承晩)의 건국사업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우국노인회 회장 및 국민회 고문으로 활약하다 김구가 암살된 후 공직에서 물러나 이후 야인으로 생활하였다.

[상훈과 추모]

1963년 대한민국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으며, 사후에 국립묘지 애국지사묘역 101번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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