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80838
한자 金宏弼
영어공식명칭 Kim Goengpil
이칭/별칭 김효동(金孝童),대유(大猷),한훤당(寒暄堂),사옹(蓑翁),문경공(文敬公),소학 동자(小學童子)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읍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이광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454년연표보기 - 김굉필 출생
활동 시기/일시 1460년 - 김굉필 혼인
활동 시기/일시 1480년 - 김굉필 생원시에 급제
활동 시기/일시 1494년 - 김굉필 남부 참봉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495년 - 김굉필 전생서 참봉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496년 - 김굉필 군자감 주부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496년 - 김굉필 사헌부 감찰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497년 - 김굉필 형조 좌랑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498년 - 김굉필 평안도 희천군에 유배
활동 시기/일시 1500년 - 김굉필 평안도 희천군에서 전라도 순천부로 이배
몰년 시기/일시 1504년연표보기 - 김굉필 사망
추모 시기/일시 1507년 - 김굉필 신원
추모 시기/일시 1507년 - 김굉필 승정원 도승지로 추증
추모 시기/일시 1517년 - 김굉필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우의정 겸 영경연사로 추증
추모 시기/일시 1575년 - 김굉필 문경으로 추시
추모 시기/일시 1610년 - 김굉필 문묘 배향
출생지 한양 정릉동 -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
외가|처가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대전리
묘소|단소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 산 1
사당|배향지 도동서원 -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지도보기
사당|배향지 옥천서원 - 전라남도 순천시 금곡동
사당|배향지 인산서원 -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읍 서원리
성격 학자|문신
성별
본관 서흥(瑞興)
대표 관직|경력 형조 좌랑

[정의]

조선 전기 달성 출신의 문신·학자.

[가계]

본관은 서흥(瑞興). 아명(兒名)은 김효동(金孝童), 자는 대유(大猷), 호는 한훤당(寒暄堂)·사옹(蓑翁)이며, 『소학(小學)』에 심취하여 스스로 소학 동자(小學童子)라 자처하였다. 증조할아버지는 예조 참의(禮曹參議)를 지낸 김중곤(金中坤), 할아버지는 의영고 사(義盈庫使)를 지낸 김소형(金小亨)이다. 아버지는 호군(護軍)을 지낸 김유(金紐), 어머니는 청성군(淸城君) 한승순(韓承舜)의 딸 숙부인(淑夫人) 청주 한씨(淸州韓氏)이며, 김굉필의 부인은 사맹(司猛)을 지낸 박예손(朴禮孫)의 딸 정경부인(貞敬夫人) 순천 박씨(順天朴氏)이다. 김굉필의 후손들은 현재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읍 지리달성군 구지면 도동리 일대에 세거하고 있다.

[활동 사항]

김굉필(金宏弼)[1454~1504]은 1454년(단종 2) 한양의 정릉동[현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에서 출생하였다. 증조할아버지 김중곤이 공조 전서(工曹典書) 곽주(郭珠)의 딸 숙부인(淑夫人) 현풍 곽씨(玄風郭氏)에게 장가감으로써, 경상도 현풍현[현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읍]에 세거지가 마련되어 있었지만,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모두 한양에서 벼슬 생활을 하였기에, 한양 정릉동의 사제(私第)에서 출생하였다. 김굉필은 어려서부터 호기스럽고 자유분방하며, 영민한 기운이 있었다고 한다.

1460년(세조 6) 김굉필은 경상도 합천군(陜川郡) 야로현(冶爐縣) 말곡(末谷) 남교동(藍橋洞)[현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대전리]의 순천 박씨 가문에 장가들었다. 이때 김굉필은 처갓집 근처에 조그마한 서재를 짓고 한훤당(寒暄堂)이라는 당호를 붙였으며, 인근 가야산(伽倻山)을 자주 왕래하며 학문을 닦는 데 힘썼다. 또한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배웠는데, 특히 『소학』에 심취하였다. 김굉필은 김종직 문하에서 『소학』의 가르침대로 행동하였으며, 『소학』을 손에서 놓은 적이 없었다. 또한 스스로 소학 동자라 자처하였는데, 주위에서 누군가 국사에 관해 물으면, "소학 동자가 어찌 큰 뜻을 알겠는가?"라고 답하였다. 김굉필이 『소학』 이외의 다른 책을 읽기 시작한 것은 30세 이후였다고 한다.

1480년(성종 11) 생원시(生員試)에 급제하였다. 1480년 한양 원각사(圓覺寺)의 한 승려가 불상을 돌려 앉혀 놓고, 불상이 스스로 움직였다고 소문을 퍼뜨렸다. 이에 백성들이 밀려들자, 김굉필은 장문의 상소문을 올려, 척불(斥佛)의 의견을 피력하였다. 1486년(성종 17) 이조 참판(吏曹參判)의 자리에 있던 스승 김종직이 국사와 관련하여 별다른 건의를 하지 않자, 이를 풍자하는 시를 올렸다. 이때부터 김굉필과 스승 김종직 간의 관계가 멀어졌다고 한다. 1487년 아버지 김유가 세상을 떠났는데, 『가례(家禮)』를 준용하여 상례(喪禮)를 치렀다.

1494년(성종 25)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 이극균(李克均)이 유일(遺逸)로 천거하여, 남부 참봉(南部參奉)에 임명되었다. 1495년(연산군 1)에는 전생서 참봉(典牲暑參奉)에 임명되었고, 얼마 안 되어 이조의 품의로 6품에 올랐다. 1496년 군자감 주부(軍資監主簿)·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1497년 형조 좌랑(刑曹佐郞)에 차례로 임명되었는데, 공직을 행하는데 사심이 없고 법도에 따랐다고 한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戊午士禍)가 발생하였다. 김일손(金馹孫)이 사초(史草)에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수록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훈구파(勳舊派)들은 「조의제문」을 근거로 김일손을 비롯한 신진 사림파(士林派)들을 대거 숙청하였다. 사림파 인사들 중 상당수가 김종직의 문인이었기에, 김굉필도 화를 피할 수 없었다. 김굉필은 김종직의 문인으로서 붕당(朋黨)을 만들고 국정을 비방하였다고 하여, 곤장 80대를 맞고 평안도(平安道) 희천군(熙川郡)에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 김굉필은 후진 양성과 학문 연구에 힘썼는데, 이때 17세의 조광조(趙光祖)가 어천도 찰방(魚川道察訪)으로 부임한 아버지 조원강(趙元綱)을 따라 희천군에 왔다가 김굉필의 문인이 되었다.

1500년(연산군 6) 전라도(全羅道) 순천부(順天府)로 유배지를 옮겼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甲子士禍)가 발생하여 죽임을 당하였다. 갑자사화로 훈구파·사림파를 막론하고,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廢妃) 윤씨(尹氏)의 죽음과 관련된 많은 인사들이 숙청되었는데, 김굉필도 폐비 윤씨 사사(賜死)에 찬성하였다고 하여, 죽임을 당하였던 것이다. 갑자사화로 김굉필의 가산은 몰수되었고, 아들 김언숙(金彦塾)·김언상(金彦庠)은 각각 하동(河東)과 사천(泗川)으로 유배되었다.

[학문과 저술]

김굉필은 친우(親友)였던 정여창(鄭汝昌)과 함께 정몽주(鄭夢周), 길재(吉再), 김숙자(金叔滋), 김종직으로 이어지는 우리나라 성리학의 적전(嫡傳)을 계승한 인물이다. 김종직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나, 김굉필과 정여창은 사장(詞章)보다 경학(經學)에 치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저술로는 『경현록(景賢錄)』과 「가범(家範)」 등이 전한다.

[묘소]

묘는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 산 1번지에 있다.

[상훈과 추모]

1506년(연산군 12)에 발생한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연산군이 왕위에서 쫓겨나자, 곧바로 정치적 신원과 함께 학문적 평가가 이루어졌다. 1507년(중종 2) 신원된 후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 도승지(承政院都承旨)로 추증(追贈)되었다. 1517년(중종 12) 영의정(領議政) 정광필(鄭光弼) 등은 일반적이 예에 따라 추증하는 것은 김굉필의 남다른 학덕을 드러내기가 부족하다며, 관작을 더 높여 올려 주고, 자손을 찾아내어 벼슬을 주자고 청하였다. 이에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우의정 겸 영경연사(議政府右議政兼令經筵事)에 추증되었다. 이외에도 중종 연간 제자 조광조를 비롯한 많은 사림파 인사들이 김굉필을 적극적으로 현양하였는데,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 김정(金淨)은 시호의 추증과 문묘 종사(文廟從祀)를 청하였으며, 성균관 유생들도 김굉필의 문묘 종사를 청원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김굉필에 대한 현양 작업은 1519년(중종 14)에 발생한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주춤하다가, 선조 연간 이후 다시 활발해졌다. 1568년(선조 1) 성균관 유생들이 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李彦迪)에 대한 문묘 종사를 청원하였으며, 1572년(선조 5)부터는 이황(李滉)을 포함하여 5현(五賢)에 대한 문묘 종사를 청원하기 시작하였다. 1575년 ‘문경(文敬)’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1610년(광해군 2) 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과 함께 문묘 종사가 이루어졌다.

김굉필은 문묘를 비롯하여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에 위치한 도동 서원(道東書院), 황해도 서흥군에 위치한 화곡 서원(花谷書院), 평안북도 희천군에 위치한 상현 서원(象賢書院), 전라남도 순천시 금곡동에 위치한 옥천 서원(玉川書院),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읍 서원리에 위치한 인산 서원(仁山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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