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11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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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南朝鮮總罷業大邱市鬪爭委員會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일수 |
설립 시기/일시 | 1946년 9월 27일 - 남조선총파업대구시투쟁위원회 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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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설립지 | 남조선총파업대구시투쟁위원회 - 대구광역시 중구 태평로 |
성격 | 파업 조직 |
설립자 | 조선노동조합대구평의회 |
[정의]
1946년 대구광역시에서 조선노동조합대구평의회가 결성한 9월총파업 추진 조직.
[설립 목적]
남조선총파업대구시투쟁위원회(南朝鮮總罷業大邱市鬪爭委員會)는 1946년 9월 27일 조선노동조합대구평의회가 대구 9월총파업을 지도할 목적으로 결성하였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대구 9월총파업을 지도하였던 남조선총파업대구시투쟁위원회 위원장은 조선노동조합대구평의회 의장 윤장혁(尹章赫)이었다. 각 산업현장에는 남조선총파업대구시투쟁위원회 지부가 설치되었고, 지부 중심으로 자경대를 편성하여 파업 투쟁을 전개하였다. 남조선총파업대구시투쟁위원회가 결성된 1946년 9월 27일 기준으로 대구 9월총파업은 철도 노동자 1,200명, 섬유 노동자 1,800명, 체신 노동자 1,200명, 출판 노동자 112명, 기타 노동자 660명 등 5,000여 명이 참가하여 진행되었다.
1946년 9월 30일에는 대구와 경상북도의 30여 개 업체가 대구 9월총파업에 참여하였다. 언론사도 파업에 돌입하였는데 좌익 성향의 『민성일보』가 9월 27일자 신문부터 제작 거부에 들어갔고, 『영남일보』·『대구시보』·『경북신문』·경북인쇄소 등은 9월 29일부터 파업에 들어가 9월 30일자 신문 제작을 거부하였다.
남조선총파업대구시투쟁위원회는 총파업의 철회를 요구하는 미군정 당국과 9월 27일 경상북도 도지사실에서 협상을 진행하였다. 9월 30일과 10월 1일 이틀 동안은 간판 철거를 요구하는 미군정 당국과 대치하였다. 대구역 주변에는 남조선총파업대구시투쟁위원회가 이끄는 철도·운수·화학·섬유 노동조합원 등 수천 명의 시위대가 ‘파업 요구 조건 관철’이라는 구호 아래 ‘쌀 배급’, ‘일급제 반대’, ‘박헌영 선생 체포령 취소하라’를 외치고, 「적기가」와 「해방의 노래」를 부르며 연좌시위를 벌였다.
1946년 10월 1일 오후 6시 무렵 남조선총파업대구시투쟁위원회와 경상북도 치안 책임자인 권영석 경찰청장과의 간판 철거 담판 결과, 경찰이 바리케이트를 풀고 철수하면 간판을 내리기로 합의하였다. 그러나 대구 9월총파업은 대구 시민들이 동참한 가운데 대규모 군중 시위로 발전하였고, 군중과 대치하고 있던 경찰의 발포에 노동자 한 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이를 계기로 대구의 9월총파업은 10월항쟁으로 이어졌다.
[의의와 평가]
남조선총파업대구시투쟁위원회가 이끈 대구 9월총파업은 10월항쟁을 촉발하는 도화선이 되었고, 대구와 경상북도에는 10월항쟁의 회오리가 몰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