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13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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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大邱第四靑年會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일수 |
[정의]
일제 강점기 대구광역시에서 결성된 청년 단체.
[설립 목적]
대구제4청년회(大邱第四靑年會)는 제4청년 계급의 역사적 사명을 위하여 청년의 단결과 교육, 훈련을 목적으로 하여 결성되었다.
[변천]
1924년 12월 16일 결성된 대구제4청년회는 1925년 7월 7월 제1회 정기총회에서 회명(會名)을 대구청년동맹으로 변경하였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대구제4청년회는 1924년 12월 16일 개최한 창립총회에서 집행위원장으로 이영민(李英敏), 집행위원으로 추산(秋山)·허홍제(許洪濟)·이순백(李順伯)·홍광(洪光)·서정섭(徐廷燮)·현상계(玄相季)·윤우열(尹又烈) 등을 선출하였다. 대구제4청년회는 1925년 1월 창립 기념 강연회를 개최하려고 하였다. 주제와 강연 제목은 ‘제4청년회 강령’[강사 윤우열], ‘청년과 제국주의’[강사 정백], ‘조선 청년운동사’[강사 한신교], ‘종교예술 신비판’[강사 진평헌], ‘사회주의와 여자’, ‘부인 운동의 양면관(兩面觀)’ 등이었다. 강연회는 강연 장소 등 여러 사정으로 연기되었다.
대구제4청년회는 1925년 1월 22일 레닌 서거 1주년을 기념하여 추도식을 거행하였다. 레닌의 추도식은 진평헌의 식사, 홍광의 ’레닌의 약력’, 회원의 ‘레닌 회고 추억담’ 등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추도식이 빌미가 되어 ’레닌 추도식’에 참가한 제4청년회 회원 중 무려 13명이 일제 경찰에 의하여 7일에서 25일까지의 구류처분을 받았다. 대구제4청년회는 일제의 구류처분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철성단과 함께 ‘불법 관헌 성토문’의 인쇄 배포, 불법 관헌 탄핵 연설회, 전국 동지 단체에 응원 요청, 민중 대회 개최 등의 대응책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윤우열, 허홍제, 김홍묵, 김훈, 홍광, 박원, 박상돈, 진평헌 등이 대책 위원으로 뽑혔다.
대구제4청년회는 1925년 1월 훔치교[증산교]와 시국대동단이 평양에서 비밀리에 강연회를 연 것에 대한 대책을 세우기 위하여 집행위원회를 열었다. 집행위원회는 보천교[증산교 계열의 신종교] 박멸책을 결의 사항으로 채택하고, 이를 위한 15인의 실행 위원을 뽑았다. 1925년 2월에는 ‘기근구제발기준비회’를 발의하고, 대구 지역의 16개 단체가 참여한 기근구제발기회를 구성하였다. 대구제4청년회는 1925년 3월 1일을 기하여 기관지 『제4청년회』를 발행하기로 하고, 기관지 발행 책임 위원으로 현철·이달·한연순·이유덕 등을 선정하였다.
대구제4청년회는 철성단, 신사상회 등과 3단체 연합으로 메이데이와 어린이날 기념 선전을 대규모로 진행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경찰의 간섭으로 행진, 강연, 선전문 살포 등을 할 수 없게 되자 원유회와 간담회로 대신하였다. 1925년 7월 7일 제1회 정기총회를 개최한 대구제4청년회는 활동 방향을 내적 충실에 두기로 하면서 노동·농민·부인·형평·소년 등 대중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기로 결의하였다. 1925년 7월 「치안유지법」 실시에 대하여 대구제4청년회 대표 윤우열은 대구경찰서에 ‘「치안유지법」 실시로 이전보다 가혹한 탄압을 하여서는 안 될 것이다’라는 입장을 밝혔다.
[의의와 평가]
대구에서 청년 대중의 단결과 교육, 훈련을 내세우면서 청년운동을 펼쳤던 대구제4청년회는 이념적으로는 사회주의사상을 갖고 있었다. 대구제4청년회는 청년운동이 민족운동으로 확대되는 것에 이바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