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18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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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大邱 旭水洞 古墳群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고분 |
지역 | 대구광역시 수성구 욱수동 산4|욱수동 산5-3|욱수동 산5-4|욱수동 48|유니버시아드로 304[욱수동 367-1]|유니버시아드로 306[욱수동 393] |
시대 | 고대/삼국 시대 |
집필자 | 민선례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98년 11월 1일~12월 31일 - 대구 옥산동·경산 중산동 유적 영남문화재연구원에서 발굴 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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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99년 12월 1일~2000년 3월 15일 - 대구 욱수동 고분군 영남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 조사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2000년 4월 1일~5월 28일 - 대구 욱수동 고분군 영남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 조사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2000년 9월 20일~2001년 10월 31일 - 대구 옥산동·경산 중산동 유적 영남문화재연구원에서 발굴 조사 |
소재지 | 대구 욱수동 고분군1 - 대구광역시 수성구 욱수동 산4|산5-3|산5-4|48 |
소재지 | 대구 욱수동 고분군2 - 대구광역시 수성구 유니버시아드로 304[욱수동 367-1]|유니버시아드로 306[욱수동 393] |
성격 | 고분군 |
양식 | 돌덧널무덤[석곽묘]|돌방무덤[석곽묘] |
[정의]
대구광역시 수성구 욱수동에 있는 삼국시대 고분군.
[위치]
대구 욱수동 고분군(大邱旭水洞古墳群)은 대구 시지택지개발지구의 서남쪽 성암산에서 북쪽의 금호강을 향하여 뻗어 내린 능선의 사면부에 있다. 대구 욱수동 고분군①[수성구 욱수동 산4, 5-3, 5-4, 48]은 대구광역시와 경산시의 경계 지대로, 성암산에서 북쪽으로 길게 뻗은 해발 90m의 나지막한 능선 일대이다. 대구 욱수동 고분군과 같은 구릉상에 인접하여 대구 옥산동·경산 중산동 유적과 경산 중산동 고분군이 있다. 대구 욱수동 고분군②[수성구 욱수동 367-1, 393]는 대구농업마이스터고등학교의 동쪽 도로 부지에 해당하며, 서쪽에 인접하여 대구 노변동 고분군이 있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1999년 12월 1일부터 2000년 3월 15일까지, 2000년 4월 1일부터 5월 28일까지 2차례에 걸쳐 영남대학교 박물관에 의하여 발굴 조사되었다. 근린생활시설 부지 내 대구 욱수동 고분군[욱수동 367-1, 393 일대]에서 98기의 무덤과 5기의 성격 미상의 유구가 확인되었다. 대구 욱수동 고분군②로 명명되었다. 대구 욱수동 고분군①의 남서쪽 일부를 포함하여 고분군과 연결되는 능선상에 있는 대구 옥산동·경산 중산동 유적에서도 삼국시대 무덤이 확인되었다. 영남문화재연구원에 의하여 1998년 11월 1일부터 1998년 12월 31일까지, 2000년 9월 20일부터 2001년 10월 31일까지 2차례에 걸쳐 발굴 조사가 진행되었으며, 삼국시대 토기가마 28기 이외에 삼국시대 돌덧널무덤 3기, 돌방무덤 18기가 조사되었다.
[형태]
대구 욱수동 고분군에서 확인되는 묘제는 구덩식돌덧널무덤[수혈식석곽묘], 앞트기식돌덧널무덤[횡구식석곽묘], 앞트기식돌방무덤[횡구식석실묘],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묘], 독무덤[옹관묘] 등이다. 돌덧널무덤은 단곽식과 다곽식이 모두 확인되며, 주위에 소형의 돌덧널무덤이나 독무덤이 배치된 돌방무덤도 확인된다. 무덤의 벽석은 할석과 천석을 이용하여 축조하였고, 덮개돌[개석]은 화강암계 판석을 이용하였다.
[출토 유물]
대구 욱수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유물은 뚜껑달린굽접시[유개고배(有蓋高杯)], 뚜껑달린굽다리항아리[유개대부호(有蓋臺付壺)], 굽다리접시, 굽다리긴목항아리[대부장경호(臺附長頸壺)], 병 등의 토기류와 쇠손칼[도자(刀子)], 미늘쇠[유자이기(有刺利器)], 낫모양철기[겸형철기(鎌形鐵器)], 쇠종방울[철탁(鐵鐸)], 쇠낫 등의 철기류, 청동허리띠고리[청동제교구(靑銅製鉸具)], 허리띠꾸미개 등의 장신구류가 출토되었다.
[현황]
대구 욱수동 고분군은 현재 택지개발이 이루어져 도로, 아파트, 병원 등이 건립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대구 욱수동 고분군은 돌덧널무덤이 주묘제로 등장하는 5세기 중반에서 7세기대의 늦은 돌방무덤의 단계로 순차적으로 축조되었다. 또한 삼국시대 고분과 함께 생활 유구, 생산 유구가 복합적으로 조사되어 삼국시대 고고학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