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2137
한자 三賢遺墟碑
영어공식명칭 Samhyeon-Yuheobi
분야 종교/유교
유형 유적/비
지역 대구광역시 달서구 조암로20길 46[월암동 681]
시대 조선/조선 후기,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구본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939년 3월연표보기 - 삼현유허비 건립
현 소재지 달암재 - 대구광역시 달서구 조암로20길 46[월암동 681]지도보기
성격 유허비
양식 대석|비신|개석
관련 인물 최성희|조득도|이언상
재질 화강석
크기(높이, 너비, 두께) 117㎝|46㎝|14㎝
소유자 삼모회
관리자 삼모회

[정의]

대구광역시 달서구 월암동에 있는 조선 후기에 월암동에 입향한 선조들을 기리는 비석.

[개설]

삼현유허비(三賢遺墟碑)임진왜란 때 난을 피하여 지금의 대구광역시 달서구 월암동 지역으로 와서 정착한 최성희(崔聖禧), 조득도(趙得道), 이언상(李彦祥)을 기리고자 1939년에 건립한 유허비이다. 비문은 민병승(閔丙承)이 지었다. 삼현유허비에 나오는 세 입향조 중 경주최씨(慶州崔氏) 최성희는 침랑(寢郞)의 벼슬에 제수되었으며, 함안조씨(咸安趙氏) 조득도는 임천군수(林川郡守)를 역임하였다. 성주이씨(星州李氏) 이언상은 강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건립 경위]

1830년(순조 30)에 건립한 재실이 1880년(고종 17)에 중수하였으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없어지게 되자 1939년에 세 사람의 후손들이 삼모회(三慕會)를 결성하고 유허비를 건립하였다. 이후 2002년에 국가의 지원을 받아 달암재(達巖齋)를 개축·복원하였다.

[위치]

삼현유허비대구광역시 달서구 조암로20길 46[월암동 681]에 있다. 유허비는 달암재 오른쪽에 있다.

[형태]

화강석으로 이루어진 삼현유허비는 비각 안에 있으며, 대석(臺石), 비신(碑身), 개석(蓋石)으로 이루어져 있다. 비신의 높이는 117㎝, 너비는 46㎝, 두께는 14㎝이다.

[금석문]

삼현유허비에는 ‘삼현유허비(三賢遺墟碑)’라는 비제가 적혀 있고, 세 입향조에 대한 소개와 칭송의 뜻을 한자로 기록하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달성의 서쪽 영암촌(靈巖村)에 옛 삼모사(三慕祠)가 있으니 곧 최참봉(崔參奉) 휘(諱) 성희(聖禧), 조은암(趙隱岩) 휘(諱) 득도(得道) 이도은(李桃隱) 휘(諱) 언상(彦祥)의 제사를 받드는 곳이다. 당시 사람들이 이를 일컬어 오(吳)나라 삼고사(三高祠)라 하였으니 이 어찌 헛되이 찬미한 것이리오. 이공(李公)은 성주인(星州人)이고 문경공(文景公) 영의정 형재(亨齋) 휘(諱) 직(稷)의 6세손이니 일찍이 율곡(栗谷) 문하에 종유하여 진사에 올라 강릉참봉(康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조공(趙公)은 함안인(咸安人)이니 정절공(貞節公) 어계(漁溪) 휘(諱) 려(旅)의 5세손으로 학행이 순독(純篤)하고 임천군수(林川郡守)로 나아가 치적이 많았다. 최공(崔公)은 경주인(慶州人)이니 판서 휘(諱) 진(津)의 현손이고 효성이 하늘이 감동할 만큼 지극하여 이로 인하여 침랑(寢郞)의 명(命)이 있었다./ 삼현(三賢)이 일찍부터 성기(聲氣)가 서로 통하였는데, 급기야 한 동리에 살면서 도의로서 교유하였도다. 후인들이 사당을 세워 삼현을 함께 봉향하였는데 지금은 그 유지(遺址)만 남아 있어 왕래하는 사람들이 그곳을 지적하였다. 세 집의 후손들이 개탄함을 이기지 못하여 향중(鄕中) 사림(士林)들과 계(稧)를 모아 비석을 세워 삼현을 추모하는 정성을 이루었으니 그 뜻이 아름답도다./ 아! 삼현의 덕이 두텁지 않았더라면 어찌 능히 후세 사람들이 크게 앙모함이 여기에 이르렀으리요. 땅이 황폐하지 아니하고 오래되어 아름다움을 나타내니 그 영령의 감응이 여기에 있지 아니하겠는가? 삼가 조군(趙君) 성대(性汏)와 이군(李君) 교돈(敎敦)과 최군(崔君) 운화(雲和)가 지은 행장(行狀)에 의거하여 대략 가감을 하였다. 나에게 와서 명(銘)을 청한 사람은 친구 진사 김용순(金容珣)이다. 명왈(銘曰)/ 삼현의 아름다운 모습은 금호강의 깨끗한 물결 같으니, 아! 오직 조공(趙公)은 이미 밝고 또 명철하여 임천군수를 사양하고 돌아와 늦도록 절의를 보전하였네. 아! 오직 이공(李公)은 해양(海陽)[백이(伯夷)]의 지결을 받아 진사로 강릉참봉에 올랐으니 은거할 뜻이 있어 일찍이 결단하였네. 효성스럽다! 최공(崔公)이여, 진실로 힘을 다하였도다. 비록 일명(一命)을 받았으나 덕의(德宜)가 높았도다. 함께 이웃에 살며 보인(輔仁)을 하였고, 함께 배향하여 제향을 드리니 옛 유허지가 다시 새롭고 여운이 끊어지지 아니하네./ 기묘년(己卯年)[1939] 3월 입하절(立夏節) 가선대부 전행(前行)이조참판 겸 동지경연의금부 춘추관 성균관사 규장각직제학 세자시강원 검교보덕 여흥(驪興) 민병승(閔丙承) 삼가 짓고 도은(桃隱) 이공(李公) 11세손 이종식(李鍾式) 삼가 쓰다[達之西 靈巖之村 古有三慕祠 乃崔參奉 諱聖禧 趙隱巖 諱彦祥 俎豆之所 而時人禰吳三高祠 是豈虛譽也哉 李公星州人 文景公 領議政 亨齋 稷之六世孫 早遊栗谷門 登進士 拜康陵參奉 遂不復就 趙公咸安人 貞節公) 漁溪 諱旅之五世孫 學行純篤 出爲林川郡守 多有治績 崔公慶州人 判書 諱津之玄孫 誠孝感天 有寢郞之命 三賢早依 三賢早依 聲氣晩與洞里 遂爲道義之敎 後人立祠幷享 今其遺址尙存 爲往來者指點 三家遺裔 不勝追感 與諸章甫 修禊立碑 以遂慕賢之誠 其意媺矣 噫 非三賢之德之厚 安能使後之人 景慕之至此 地不忍荒而永久褒美 其明靈之感 不其在玆乎 謹依趙君性汏 李君敎敦 崔君雲和之狀 而略修之 來謁銘者 金友庠舍 容珣也銘曰/ 三賢精彩 琴湖之潔 於惟趙公 旣明且哲 投紱林川 歸保晩節 於惟李公海陽之訣上庠侍陵 隱志早決 孝哉崔公 誠盡力碣 雖有一命 德宜崇秩 同隣輔仁 祭乃幷列 舊墟更新 餘韻不絶/ 歲己卯三月立夏節 嘉善大夫 前行吏曹參判 兼 同知經筵義禁府 春秋館 成均館事 奎章閣直提學 世子侍講院 檢校輔德 驪興 閔丙承 謹撰 桃隱李公 十一世孫 鍾式 謹書].”

[현황]

삼현유허비는 재실인 달암재 경내 비각에 있다. 달암재에 현재 관리인이 거주하고 있지 않으나, 삼모회가 관리하여 보존 상태는 양호하다.

[의의와 평가]

삼현유허비월암동에 처음으로 정착한 입향조를 기리는 숭조(崇祖) 정신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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