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24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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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夏東奎 |
영어공식명칭 | Ha Dongkyu |
이칭/별칭 | 취오(聚五),금은(琴隱)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대구광역시 수성구 만촌동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김충희 |
출생 시기/일시 | 1873년 - 하동규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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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시기/일시 | 1943년 - 하동규 사망 |
출생지 | 만촌동 - 대구광역시 수성구 만촌동 |
수학|강학지 | 독무재 - 대구광역시 수성구 화랑로42길 33[만촌1동 188-1] |
성격 | 학자 |
성별 | 남성 |
본관 | 달성(達城) |
[정의]
개항기 대구 출신의 학자.
[가계]
하동규(夏東奎)[1873~1943]의 본관은 달성(達城)이며, 자는 취오(聚五), 호는 금은(琴隱)이다. 할아버지는 하석윤(河錫胤)이고, 아버지는 하상락(河祥洛), 어머니는 서재곤(徐在坤)의 딸 달성서씨(達城徐氏)이다. 형은 하동기(夏東箕)이다.
[활동 사항]
하동규는 1873년(고종 10) 지금의 대구광역시 수성구 만촌동에서 태어났다. 1897년부터 형 하동기와 함께 송병선(宋秉璿)[1836~1905]·송병순(宋秉珣)[1839~1912] 형제에게 학문을 배웠다. 1897년 가을에는 5대조인 열암(悅菴) 하시찬(夏時贊)[1750~1828]이 지은 『팔례절요(八禮節要)』를 간행하였다.
스승인 송병선은 한일병합조약[을사늑약]의 폐기를 주장하다가 순국하였고 송병순 또한 한일 합병이 이루어진 것을 안타까워하다가 1912년 순절하였는데, 그 소식을 듣고 하동규 형제는 상복을 입고 장례에 참여하여 통곡하고 제문을 지었다. 하동규는 그 후 하시찬의 강학처에 건립한 독무재(獨茂齋)에서 강학을 하며 후학들을 지도하거나 산천을 유람하며 여생을 보내다가 1943년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하동규의 문집으로는 『금은유고(琴隱遺稿)』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