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28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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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義兵 |
영어공식명칭 | Righteous Army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임삼조 |
[정의]
개항기 일본의 침략에 맞서서 대구 지역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난 민병.
[개설]
대구 지역은 경상감영이 설치된 경상도의 중심 도시여서 대구를 기반으로 의병 부대가 만들어지거나 전투가 벌어지지는 않았다. 대구 출신 의병들은 주로 다른 지방의 의병 부대에 소속되어 항일 의병전쟁을 전개하였다.
[전국 최초 을미의병을 일으킨 문석봉]
문석봉(文錫鳳)[1851~1896]은 1851년 지금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읍에서 태어났다. 1895년 2월 공주부(公州府)의 신영(新營) 영장(營將)으로 임명되었다.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1895년 9월 18일 현 대전광역시 유성구에서 의병을 조직한 후 전국 각지에 「창의시통전국문(倡義時通全國文)」을 보내 을미사변을 “천고(千古)에 없는 강상(綱常)의 대변(大變)”이라고 통분하면서 ‘국수보복(國讐報復)’의 기치를 내걸고 의병을 일으켜 적을 무찌르자고 하였다. 유성의병은 회덕현의 무기고를 습격하여 의병 부대에 필요한 무장력을 갖추었고, 진잠과 공암을 지나 1895년 10월 28일 공주부로 진출하였다. 비록 공주 와야동[현 공주시 소학동] 전투에서는 대패하였지만, 경상도 고령·초계 등지에서 재봉기를 준비하였다. 1895년 11월 24일 고령현감의 밀고로 문석봉은 체포되어 대구부에 구금되었다. 1896년 봄에 대구감옥을 탈출하여 과천·서울을 거쳐 원주 등지에서 거병하려 하였으나 병을 얻어 고향 현풍으로 돌아왔고, 1896년 11월 병세가 악화되어 사망하였다. 문석봉의 유성의병을 계기로 전국적으로 을미의병이 일어나게 되었다.
[우재룡과 산남의진]
대구 지역의 대표적인 의병 부대는 산남의진이다. 중추원 의관 정환직(鄭煥直)의 아들 정용기(鄭鏞基)[1862~1907]는 이한구(李韓久)·이지포(李芝圃)·정순기(鄭純基) 등과 함께 현 경상북도 영천시에서 ‘창의소’라는 이름으로 의병 부대를 조직하였다. 창의 당시 1,000여 명이 참여하였으며, 1906년 3월 산남의진으로 개칭하였다. 산남의진은 주로 팔공산(八公山)을 비롯하여 청하·청송·영천·신녕·안동·의성·경주 등 경상북도 북부 지역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우재룡은 지금의 경상남도 창녕군 대지면 왕산리에서 태어났지만 대구로 이주하였고, 1902년 대구진위대에 입대하였다. 대구진위대 근무 당시 산남의병장 정용기를 만나 항일 의병에 투신하게 되었다. 우재룡은 1907년 군대 강제해산 이후 산남의진에 합류하여 연습장과 선봉장을 맡았다. 이후 팔공산을 본거지로 하는 영천 서부 지역의 의병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우재룡은 팔공산 동화사(桐華寺)에 거점을 마련하고 본부와 다른 지역의 유격대와 연락을 취하며 항일전을 펼쳤다. 또한 경상북도 칠곡군의 가산동·구곡동 등지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을 펼쳐 항일전에 필요한 무기를 구입하였다. 우재룡은 1908년 5월 고령의 유격대로부터 구입한 무기 50정을 대구에서 건네받아 팔공산으로 돌아오다가 미리 정보를 입수한 일본군에게 체포되었고, 1908년 종신유형[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될 때까지 평생을 독립운동에 매진하였다.
[공훈을 받은 항일 의병]
대구의 대표적인 항일 의병으로는 문석봉·김성륙(金成六)[1863~1908]·손명선(孫明善)[1871~?], 박화준(朴華俊)[1881~1911] 등이 있다. 문석봉은 1993년 건국훈장 독립장, 김성륙은 1996년 건국훈장 애국장, 손명선은 2020년 건국훈장 애족장, 박화준은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박화준은 1907년 신돌석의 의병 부대인 영릉의진에 참여한 의병으로서, 밀고자 고제승(高濟昇)과 의병에게 강도짓을 한 최익수(崔益守)를 처단하고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체포되었다. 1911년 5월 22일 교수형을 언도받고 순국하였다.
김성륙은 1908년 1월 충청남도 공주군 정안면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군사를 모집하다가 일본 헌병대와 교전 중 전사하였다.
손명선은 1908년 충청북도 충주군 김학선(金學善)의 의진에 참여하여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체포되어 10년형을 징역 10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