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39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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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朝鮮製絲 |
분야 |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대구광역시 중구 동인동1가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박노광 |
설립 시기/일시 | 1919년 5월 - 조선생사 설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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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체 시기/일시 | 1952년 3월 - 조선생사 해체 |
최초 설립지 | 조선생사 - 대구광역시 중구 동인동 |
성격 | 제조업체 |
설립자 | 일본 미쓰이물산[三井物産]|야마모토 조타로[本山條太郞] |
[정의]
일제 강점기 대구광역시 중구 동인동에 있었던 제사업체.
[개설]
조선생사는 1919년 5월에 대구광역시 중구 동인동에 조선방직 설립자인 야마모토 조타로[本山條太郞]가 일본 나가노현 신슈[信州]계의 제사 자본, 미쓰이물산과 공동으로 설립한 회사이다.
[설립 목적]
조선생사는 일제가 일본 국내의 임금이 인상되어 생산비가 상승하고 생사의 주원료인 누에고치가 부족하여졌기 때문에 원료와 노동력이 풍부한 대구·경북 지역으로 진출하면서 설립한 회사이다.
[변천]
조선생사는 1919년 5월에 대구광역시 중구 동인동에 공장 건설비 25만 6000원을 투자하여 부지면적 7,000평[약2만 3140㎡], 공장 면적 2,152평[약 7,114㎡] 규모의 공장을 건립하여 조업을 개시하였다. 1921년 기준으로 조선생사는 설치 가마 수가 400개, 노동자 수가 465명, 생사 생산량은 4,800관이었다.
1935년에는 조선생사의 설치 가마 수가 458개이었으며, 생사 생산량이 8만 1375톤으로 전체 기계사 생산점유율 6.7%로 나타났다. 조선생사의 가마 수를 비교하여 보면 1921년 400개에서 1935년에 458개로 거의 증가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설비투자를 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조선생사는 전국 제사 공장 가운데 가마 수에서는 4위, 생사 생산량은 편창제사 대구제작소와 대구제사에 이어 3위를 차지하였다. 당시 조선생사는 누에고치를 생사로 가공하여 곧장 일본으로 반출하였기 때문에, 대구의 생사업은 국내의 직물 생산과 연결되지 않고 일본의 방직공업과 바로 연결되어 부가가치가 낮았다.
한국에 진출한 일본의 다른 생사 회사와 같이 조선생사가 대구에 진출한 것은 일본 국내의 임금이 인상되어 생산비가 상승하고 생사의 주원료인 누에고치가 부족하였기 때문이다. 대구·경북 지역은 낙동강 상류 지역인 상주·안동·문경·예천 등의 기후 조건이 양잠에 적합하고 논이 적고 밭이 많으면서 인구가 과잉한 지역이라 양잠업이 발달하였다. 특히 당시 제사 공장 특성상 노동자의 90%가 여성이었으며, 조선인 여성 노동자의 평균임금은 1931년 기준 일급 41전으로 일본 여성 노동자의 일급 78전에 비하여 매우 낮았다. 또 하루에 12시간, 1년에 320일이 넘는 장시간 노동이라는 열악한 작업 환경에서 근무하여야만 하였다.
해방 이후 조선생사는 귀속재산이 되었으며, 이 회사의 후신인 대한생사는 1951년 9월에 관리인 이종완과 구재구 양인에게 7억 3000만 원에 불하되었으나, 자금난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1952년 3월 19일 김지태의 한국생사에 인수되었다.
[의의와 평가]
조선생사을 비롯한 일본의 3대 제사공장의 가동으로 종래 대구의 공장 구조가 식료품 및 연초 제조업 중심에서 섬유공업 중심으로 전환되는 계기가 되었다. 해방 이후 일본인 자본의 섬유 공장은 모두 귀속재산으로 편입되었고, 이를 불하받은 한국인 자본가가 지역의 섬유산업을 주도하면서 대구는 한국 섬유산업의 메카로 자리 잡았다. 반면 조선인 여성 노동자들은 장시간, 장기간 그리고 열악한 노동환경에 노출되어 노동력을 착취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