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50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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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大邱松竹映畵劇場 |
이칭/별칭 | 대구쇼치쿠영화극장,송죽극장,대송광,대영관,소명관,신흥관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 |
유형 | 지명/시설 |
지역 | 대구광역시 중구 교동길 15[화전동 11-1]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김석배 |
[정의]
대구광역시 중구 화전동에 있던 극장.
[건립 경위]
1940년 7월 6일에 시마다 가네시로[島田金四郞]가 신흥관(新興舘)[신코칸]을 인수하여 대구송죽영화극장으로 개관하였다.
[변천]
대송관(大松舘)[다이마쓰칸]은 1921년 대구부 전정(田町)[다마치] 11번지, 즉 지금의 중구 화전동 11번지 송죽씨어터 자리에 일본인을 주 관객으로 하는 활동영화 상설 상영관으로 설립되었다. 대송관은 1927년 6월 대영관(大榮舘)[다이에이칸]으로 바뀌었다. 즉, 1927년 5월 18일 만경관이 실화로 전소하자 이제필이 향촌동의 대영관을 빌려 6월 11일부터 ‘만경관’이란 관명으로 영업을 하게 되고, 대송관은 대영관으로 관명을 바꾸었다. 1929년 7월 소명관(昭明舘)[쇼메이칸], 1931년 4월 신흥관(新興舘)[신코칸], 1940년 7월 6일에 대구송죽영화극장(大邱松竹映畫劇場)[대구쇼치쿠영화극장]으로 개관하였다.
시마다 가네시로가 오랫동안 폐업 상태로 있던 신흥관을 인수하여 관명을 ‘송죽영화극장’으로 변경였고, 대대적으로 보수한 후 1940년 7월 5일에 시사회를 열고 7월 6일에 개관하였다. 「조차 장인명(彫次長人名)」, 「산장의 괴사건[山莊の怪事件]」, 「국지 천본창(菊地千本槍)」 등을 상영하였다.
대구송죽영화극장은 해방 후 조선영화극장으로 바뀌었다가 곧 ‘대구송죽영화극장’으로 다시 바뀌었다. 그 후 송죽극장으로 바뀌었다가 오랫동안 휴관 끝에 2009년 말에 대대적인 리모델링 공사를 거쳐 송죽씨어터로 재개관하였다.
송죽극장에서는 1959년 2월 8일 구정에 「카우보이」, 9월 16일 추석에 「풍운의 젠다성」을 상영하였다. 1960년에는 1월 1일에 「카심」, 1월 28일 구정에 「그 여자의 죄가 아니다」, 10월 5일 추석에 「혁명아 사바다」를 상영하였다. 1961년에는 1월 1일에 「비장한 대결」, 2월 15일 구정에 「대진군」을 상영하였다.
1970년에는 1월 1일에 「프로펫쇼날 외인특전대」, 2월 6일 구정에 「표범 황혼에 떠나가다」, 9월 15일 추석에 「대왕 알프렛」을 상영하였다. 1971년에는 1월 27일 구정에 「제7의 사나이」, 10월 3일 추석에 「솔져 부루」를 상영하였다. 1977년에는 1월 1일에 「튜니티라 불러다오」, 2월 18일 구정에 「그레이트 후라이데이」, 9월 27일 추석에 「실버 스트릭」을 상영하였다.
1998년에는 1월 1일에 「소림사 10대 제자」, 2월 7일 구정에 「7인의 독수리」, 9월 17일 추석에 「소림사 흑표」를 상영하였다.
[구성]
1942년 9월 당시 경영자는 이토 야스고[伊藤勘吾], 수용 인원은 570명, 발성기와 영사기 모두 로열이었다.
1958년 8월 당시 35㎜ 영사기 2대, 자가발전기 2대, 수용 인원 1,100명, 종업원 14명이었다.
1959년 당시 2층 157평[519㎡], 수용인원 900명, 종업원 16명, 연중 관람 인원 28만 8,020명이었다. 1964년 당시 대표는 육병룡, 1972년 당시 대표는 이중화, 1999년 당시 대표는 이정광이었다.
[현황]
현재는 2009년 말에 대대적인 리모델링 공사를 거쳐 300석 규모의 송죽씨어터로 재개관하여 주로 연극 공연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