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64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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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伊洛書堂記 |
영어공식명칭 | Yirakseodanggi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서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영호 |
저자 생년 시기/일시 | 1738년 - 「이락서당기」 저자 이동급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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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술|창작|발표 시기/일시 | 1799년 - 「이락서당기」 창작 |
저자 몰년 시기/일시 | 1811년 - 「이락서당기」 저자 이동급 사망 |
편찬|간행 시기/일시 | 1866년 - 『만각재집』 간행 |
편찬|간행 시기/일시 | 1926년 - 『만각재집』 간행 |
배경 지역 | 이락서당 - 대구광역시 달서구 달구벌대로 965[파호동 46-1] |
성격 | 잡기류|기문 |
작가 | 이동급 |
[정의]
1799년 조선 후기 칠곡 출신 유학자 이동급이 지은 대구광역시 달서구 파호동 이락서당의 기문.
[개설]
「이락서당기(伊洛書堂記)」의 저자 이동급(李東汲)[1738~1811]의 본관은 광주(廣州)이며, 자는 진여(進如)이고, 호는 만각재(晩覺齋)이다. 백불암(百弗菴) 최흥원(崔興遠)[1705~1786]의 사숙인(私淑人)을 자처하였다. 저서로는 1866년 후손들이 이동급의 시가와 산문을 묶어 간행한 『만각재집(晚覺齋集)』이 있다. 『만각재집』은 1926년 목판본으로 다시 간행하였다.
이동급은 1799년에 박광정(朴光正), 도필정(都必貞) 등과 함께 이락서당을 창건하였다. 이락서당은 정조(正祖)[1752~1800]의 명으로 건립된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1620]와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1550~1615]의 학덕을 기리기 위한 강학소이다. 1798년 지금의 대구광역시 달서구 파호동에 건립을 시작하여 이듬해 1799년 봄에 완공하였다. 서당의 규모는 여덟 칸인데, 정당(正堂)이 네 칸이고 협실이 네 칸이다. 「이락서당기」는 이락서당이 완공된 1799년에 지은 것이다.
[구성]
「이락서당기」는 이락서당의 건립 계기와 ‘이락(伊洛)’의 의미, 서당의 주변 경치, 정구와 서사원의 학문적 연원을 밝히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용]
「이락서당기」는 인재 교육을 위한 서당 건립의 의의를 밝히며 글을 시작하였다. 정조의 명으로 서당을 건립하게 되었음을 밝히고 서당의 위치와 규모를 설명하였다. 1798년 9월에 서당 건립을 시작하여 이듬해 1799년 늦봄에 공사를 마치고 재(齋)의 명칭을 ‘모한(慕寒)’과 ‘경락(景樂)’이라 한 이유를 밝혔다. ‘모한’이라 이름한 것은 한강 정구를 존모한다는 뜻이고, ‘경락’이라 이름한 것은 낙재 서사원을 경앙한다는 뜻이다. 이어서 서당의 이름을 ‘이락’이라 한 것은 이강(伊江)과 낙수(洛水)가 만나는 곳이기 때문이라 밝히고 있다. 이락서당은 앞으로 큰 들을 마주하고 있고 여러 산봉우리들이 공손히 읍하는 모양을 취하고 있다고 하며 주변 경치를 시적으로 표현하였다. 글의 중반을 넘어서는 이동급의 의론이 전개되고 있다. 서당이 공간적으로 가지는 의미를 위기지학(爲己之學)과 연결하여 제시하고, 이를 정구와 서사원의 학문적 실천과 연결하여 후학들을 권면하였다.
[특징]
「이락서당기」는 전반부에 이락서당에 관한 정보를 전달하고, 후반부에서는 의론(議論)을 전개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이락서당기」는 정격의 기문 형식과 변격의 기문 형식이 공존하는 기문이다. 정보 전달과 함께 학문에 대한 의론을 정구와 서사원의 사례를 들어가며 서술하고 있다. 이락서당의 시원(始原)과 건립의 과정이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