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81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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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大邱 廣文社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대구광역시 중구 서야동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일수 |
설립 시기/일시 | 1906년 1월 - 대구 광문사 설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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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칭 시기/일시 | 1907년 1월 29일 - 대구 광문사 내 문회가 대동광문회로 개칭 |
최초 설립지 | 대구 광문사 - 대구광역시 중구 서야동 |
성격 | 계몽운동 단체 |
[정의]
개항기 대구광역시에서 설립된 계몽운동 단체.
[개설]
대구 광문사(大邱 廣文社)는 1906년 1월 대구에서 거대 상인, 지주층, 전직 관료, 개명 유교 지식인 등 지역의 유지들이 설립한 계몽운동 단체이다. 대구 광문사는 출연금 100냥을 납입해야 가입할 수 있었다. 대구 광문사는 사장에 김광제(金光濟)[1866~1920], 부사장에 서상돈(徐相墩)[1851~1913]을 선출하였다.
[설립 목적]
대구 광문사는 서울의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와 같은 계몽운동 단체이며, 흥학설교(興學設敎)의 교육 운동과 식산흥업(殖産興業)의 산업 진흥을 목적으로 하였다.
[변천]
대구 광문사 내 문회(文會)는 1907년 1월 29일 특별회를 소집하여 ‘대동광문회(大同廣文會)’로 단체 이름을 변경하였다. 대동광문회가 설립된 특별회에서 회원인 서상돈이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을 전개하자고 제의하였고, 참석자 전원의 찬성으로 「국채일천삼백만환보상취지서(國債一千三百萬圜報償趣旨書)」라는 격문을 작성하여 발표하였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대구 광문사는 1906년 2월 경상북도관찰사 이근호(李根澔)를 통하여 “치국의 요무는 백성을 교육하는 데 있고, 백성을 교육하는 방법은 학교의 설립에 있다”라고 학부에 보고를 올렸다. 주요 내용은 경상북도관찰부의 관할인 낙육재(樂育齋)와 양사재(養士齋)와 같은 양재(兩齋)를 활용하여 김광제를 교장으로 하는 사립 보통학교 설립 인가를 요청하는 것이었다. 김광제는 학부 보고에서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인민을 문명하게 하려면 8세 이상의 남녀를 모두 소학교 교육을 해야 한다”라고 주장하였다.
대구 광문사는 1906년 4월 총회를 개최하여 학교 설립 방침을 의결하고, 대구 광문사 내에 문회를 설치하였으며, 400명에서 500명의 회원을 확보할 계획을 세웠다. 대구 광문사 문회는 일본의 동아동문회(東亞同文會), 청나라의 광학회(廣學會)와 같은 계몽운동 단체와 국제적으로 연계하여 상호 친목 도모와 교육 진흥을 확장할 계획이었다. 대구 광문사 문회는 강제적 의무, 곧 의무교육제를 시행하여 인재를 양성하여야 한다는 내용으로 정부에 건의하였다.
대구 광문사는 계몽을 위하여 출판 활동도 강조하였다. 동서양 서적의 번역 출판과 충효열행(忠孝烈行)에 관한 사례집, 각 군 관리의 잘잘못과 인민의 선악을 조사하여 매월 3회 잡지를 발행할 계획으로 찬술원(纂述員)을 설치하였다. 대구 광문사는 덕육 교육을 위하여서는 전통 유교 교육에 주목하고, 『사서(四書)』의 심성정(心性情)과 인의예지(仁義禮智)를 기저로 한 교과서 편찬 계획을 세웠다.1907년 6월에는 『영남신보』라는 제호의 신간 발간 승인을 받았다. 또 출판 활동을 위하여 활자와 활판을 일본에서 들여오고자 하였다. 대구 광문사는 영 존 앨런(Young John Allen)[1836~1907]이 한역한 법학서 『만국공법요략(萬國公法要略)』[원제: A Handbook of International Law]를 출판하였고, 1906년 5월 자치 조직으로 인민대의소(人民代議所)를 조직하여 운영하였다.
[의의와 평가]
대구 광문사는 대구에서 교육 진흥 운동와 산업 진흥 운동을 목적으로 한 계몽운동 단체로서, 교육, 연구, 출판 등의 활동을 광범위하게 전개하였다. 대구 광문사는 계몽운동의 지역 기반을 확보하고, 계몽운동이 전국으로 확대될 수 있도록 노력하였으며, 1907년 1월 국채보상운동의 발생 배경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