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82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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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大邱 月城洞 遺蹟五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서구 월성동 |
시대 | 선사/청동기 |
집필자 | 김병섭 |
조성|건립 시기/일시 | 청동기시대 - 대구 월성동 유적5 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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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 조사 시기/일시 | 2004년 5월 21일~7월 15일 - 대구 월성동 유적5 영남대학교박물관에서 발굴 조사 |
원소재지 | 대구 월성동 유적5 - 대구광역시 달서구 월성동 133|1275 일원 |
성격 | 생활 유적 |
[정의]
대구광역시 달서구 월성동에 있는 청동기시대 생활 유적.
[개설]
대구 월성동 유적5(大邱月城洞遺蹟五)는 대구광역시 달서구 월성동에 있는 청동기시대 생활 유적이다. 아파트 및 부대시설 신축공사와 관련하여 2004년 5월 21일부터 2004년 7월 15일까지 영남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 조사를 실시하였다. 조사 결과 청동기시대 집자리[住居址], 야외화덕자리[野外爐址], 석축형돌널무덤[石築形石棺墓], 수혈 유구와 남북국시대의 돌방무덤[石室墓], 고려시대 돌덧널무덤[石槨墓]도 함께 확인되었다. 유물은 청동기시대 붉은간토기[赤色磨硏土器], 민무늬토기[無文土器], 돌도끼[石斧], 돌칼[石刀], 돌화살촉[石鏃] 등 125점이 출토되었다.
[위치]
대구 월성동 유적5은 대구광역시 달서구 월성동 133번지 일대에 있다. 월성동은 진천천 하류부 북안에 넓게 펼쳐져 있는 월배 선상지의 선단부에 해당된다. 월배 선상지에는 상인동 지석묘, 상인동 입석, 월성동 지석묘군, 진천동 지석묘군, 진천동 입석[사적 제411호], 월암동 입석군 등이 알려져 있고, 택지개발사업이 이루어지면서 선사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유적이 발굴 조사되었다. 유적 남쪽과 서쪽으로 인접하여 월성동 1300유적과 월성동 지석묘②, 월암동 입석, 남동쪽으로 월성동 지석묘①이 있다.
[형태]
대구 월성동 유적5에서는 청동기시대 집자리 17기가 조사되었는데, 장방형 6기, 방형 3기, 원형 6기, 파괴되어 형태를 파악하기 어려운 집자리가 2기이다. 장방형, 방형 집자리에서는 중 10호, 15호에서는 돌을 두른 화덕자리[圍石式爐址], 11호에서는 구덩이 화덕자리[竪穴式爐址], 17에서는 평지 화덕자리[平地式爐址]가 확인되었고, 모든 주거지에서 바닥면을 다짐처리하였다. 유물은 민무늬토기 바리[鉢], 독[壅], 붉은간토기항아리[赤色磨硏土器壺], 대팻날도끼[扁平偏刃石斧], 조갯날돌도끼[蛤刃石斧], 숫돌[砥石], 갈판[碾石] 등이 출토되었다. 민무늬토기에는 겹아가리토기[二重口緣土器]와 겹입술골아가리토기[二重口緣口脣刻目土器]도 확인되었다.
원형집자리는 내부에 중앙 수혈과 수혈 양쪽에 기둥구멍이 있는 것이 3기, 2개의 기둥구멍만 있는 것이 2기, 중앙 수혈만 있는 것이 1기이다. 이러한 원형 집자리는 모두 송국리식 집자리[松菊里式住居址]의 범주에 포함되며, 2개의 기둥구멍만 확인되는 집자리 형태는 대구 지역의 특징으로 보며 동천동식 집자리[東川洞式住居址]로도 불린다. 원형 집자리에서 출토 유물은 많지 않은데, 붉은간토기항아리와 골아가리토기조각과 골아가리와 혹모양손잡이[瘤狀把手]가 부착된 토기 조각이 확인되었고, 돌화살촉, 돌칼 조각, 숫돌, 대롱옥[管玉] 등이 출토되었다. 야외노지는 불 맞은 돌과 소토나 목탄이 함께 확인되고 있고, 수혈 유구는 원형과 부정형을 띠며, 원형 집자리 주변에 분포하고 있다. 조사 범위 북동쪽으로 너비 100~150m 정도 유구가 확인되지 않는 공백 지역이 남동-북서 방향으로 길게 확인되는데, 퇴적 양상과 인근 지역에서 발굴 조사된 자료를 분석한 결과 청동기시대 선상지를 개석(開析)한 하도(河道)로 파악된다.
[현황]
대구 월성동 유적5는 발굴 조사 이후 아파트 및 부대시설이 조성되었고, 주변 선상지 선단부도 도시개발로 인하여 원래의 형태를 찾기 어렵다.
[의의와 평가]
청동기시대 전기의 장방형, 방형 집자리와 중기의 원형 송국리식 집자리가 함께 확인되었다. 남서쪽에 인접한 월성동 1300유적에서도 원형 송국리식 집자리 8기가 확인되었기 때문에 중기에 규모가 큰 마을이 월배 선상지 선단부에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그리고 지형 분석을 통하여 유적 북서쪽으로 하도가 형성되어 있었음이 밝혀져 청동기시대 월배 선상지의 경관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