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205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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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仁川蔡氏 |
영어공식명칭 | Incheon Chaeclan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대구광역시 동구 미대동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황동권 |
본관 | 인천 - 인천광역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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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향지 | 인천채씨 입향지 - 대구광역시 동구 미대동 |
세거|집성지 | 인천채씨 집성지 - 대구광역시 동구 미대동 |
성씨 시조 | 채선무 |
입향 시조 | 채영 |
[정의]
고려시대 동지추밀원사를 지낸 채선무를 시조로 하고, 채영을 입향조로 하는 대구광역시 동구 미대동에 세거한 성씨.
[연원]
인천채씨는 고려 때 동지추밀원사를 지낸 시조 채선무(蔡先茂)의 후손들이 인천에 세거하면서 채씨일문을 이루었다. 고려 말에 호조전서(戶曹典書)를 지내다가 조선이 개국되자 절개를 지켜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가서 은거한 채귀하(蔡貴河)를 중조(中祖)로 하는데, 대구광역시 동구 미대동의 인천채씨는 채귀하의 후손들이다.
[입향 경위]
인천채씨는 고려 때 동지추밀원사를 지낸 시조 채선무(蔡先茂)를 시조로 하며, 여말선초 고려에 대한 절개를 지켜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가서 은거한 채귀하(蔡貴河)를 중시조로 한다. 채귀하의 아들 채영(蔡泳)은 대구 후동(後洞), [지금 대구광역시 중구 포정동]에서 태어났다. 진사로 여러 차례 조정의 부름을 받았으나, 부친의 명에 따라 고려에 대한 절의를 지켜 출사하지 않고 대구시 팔공산 자락 미대동에 입향하였다.
[현황]
채영이 대구광역시 동구 미대동에 입향한 이후 그의 후손들이 번창하여 많은 명현을 배출하고 대구·경북 인천채씨의 맥을 형성하였다. 대표적인 인물로 송담(松潭) 채응린(蔡應麟)[1529~1584)과 채응린의 아들인 양전헌(兩傳軒) 채선견(蔡先見)[1574~1644) 및 금탄(琴灘) 채선길(蔡先吉)[1569~1646], 투암(投巖) 채몽연(蔡夢硯)[1561~1638]과 그의 아들 백포(柏浦) 채무(蔡楙)[1588~1670], 19세기 말 효자로 이름난 치헌(痴軒) 채귀해(蔡龜海)[1850~1905], 19세기 문인 학자 미피거사(渼陂居士) 채화국(蔡華國) 등을 꼽을 수 있다.
한편, 일제가 1930년에 우리나라 성씨를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당시까지 미대동 인천채씨는 약 74가구 정도가 집성촌을 형성하면서 거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현재는 도시화되면서 집성촌으로서 기능을 상실하였다.
[관련 유적]
인천채씨와 관련된 유적으로는 경상북도 칠곡군 기산면에 있는 소암서원(嘯巖書院), 대구광역시 북구 검단동에 있는 의현사(義峴祠), 대구광역시 동구 미대동에 있는 성재서당(盛才書堂)[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9호]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