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8088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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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禹夏敎 |
영어공식명칭 | Woo Hagyo |
이칭/별칭 | 윤흠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일수 |
[정의]
일제 강점기 달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본관은 단양(丹陽). 자는 윤흠(允欽), 호는 노암(魯菴). 증조할아버지는 우이진(禹履鎭), 할아버지는 우해정(禹海鼎)이다. 아버지는 우권동(禹權東), 어머니는 조봉대부(朝奉大夫) 이석린(李錫麟)의 딸 인천 이씨(仁川李氏)이다.
[활동 사항]
우하교(禹夏敎)[1872~1941]는 1872년 5월 1일 경상북도 달성군 월배면 상인동에서 태어났다. 1913년 음력 정월 대보름날 달성군 수성면 대명동 안일암에서 시회(詩會)를 가장하여 결성된 재건 달성 친목회[조선 국권 회복단 중앙 총회]에 참여하였다. 달성 친목회는 민족 독립을 위해 결성된 비밀 결사였고, 혁신 유림, 지식인, 경제인, 은행원 등 다양한 성향의 인물들이 참여하였다. 1919년 3·1 운동이 전국에서 폭발적으로 일어나고, 또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되는 등 민족 독립의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전개된 달성 친목회의 만세 운동 확산 노력과 독립운동 자금 모집에 적극 참여하였다.
유림계의 파리 강화 회의 독립 청원서 운동에도 참여하였다. 장석영(張錫英)을 찾아 파리 강화 회의에 보낼 조선 독립 청원서 초안을 써달라고 부탁하였다. 독립 청원서의 초안을 첨삭한 뒤 김응섭(金應燮)이 영문으로 번역하였다. 그 뒤 조선 총독부 총독 및 파리 평화 회의에 제출할 청원서를 칠곡의 이수목(李壽穆)을 통해 전달받았다. 번역된 독립 청원서는 김응섭(金應燮)과 남형우(南亨祐)를 통해 중국 상하이에서 배부되었다. 그러나 독립 청원서 활동이 일제 당국에 발각되어 1919년 8월 윤상태(尹相泰)가 피체되자, 예심에서 증인으로 불려나가 독립 청원서 관련 사실을 부인하였다. 1919년 10월 대구 지방 법원에서 위증죄로 징역 6월을 선고받고 대구 형무소에 복역하였다.
[저술 및 작품]
유고로 『노암 문집(魯菴文集)』이 전한다.
[상훈과 추모]
1983년 대통령 표창, 1990년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