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812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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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郭乃鎔 妻 全義李氏 |
분야 | 종교/유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효자·열녀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읍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홍수 |
[정의]
조선 후기 경상도 현풍현 출신의 열녀.
[가계]
본관은 전의(全義). 아버지는 이명후(李命厚)이다.
[활동 사항]
선비 곽내용(郭乃鎔)의 처 전의이씨(全義李氏)는 어려서부터 집안에서 『효경(孝經)』을 익혀 어른을 봉양함에 빈틈이 없어 일가친척들로부터 칭송이 자자하였다. 하지만 이씨는 나이 19세에 결혼을 한 지 불과 6개월 만에 남편이 세상을 떠나는 불운을 겪어야 하였다. 그래서 더 이상 세상을 살아갈 의미를 갖지 못하였다. 남편의 장례식 이후로 식음을 전폐하며 남편의 뒤를 따를 결심을 하였다. 하지만 양가의 부모들은 죽어 가는 이씨를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이씨의 시부모가 이렇게 말하였다. “외아들을 잃은 우리는 이제 너밖에 의지할 데가 없다.”
하지만 이씨의 마음을 돌이킬 수는 없었다. 그러자 병석에 있는 친정아버지가 이씨를 불러 이렇게 말하였다. “네가 죽게 된다면 나의 병이 나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나 또한 죽게 될 것이다.”
이씨는 차마 아버지를 죽게 하는 불효를 저지를 수 없었다. 그날 이후로 이씨는 비록 연명할 정도였지만 식사를 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머리를 들고 남을 대하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 한 집안의 식구라고 해도 이씨의 얼굴을 보거나 말소리를 들은 사람이 없었다. 그로부터 넉 달 만에 친정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이씨는 다시 음식을 거부하고 기어이 이승에서의 삶을 마쳤다. 장례식 날에 이씨의 행상(行喪)이 남편의 묘소 곁을 지나는 순간 무덤의 봉축(封築)이 갈라지는 이변이 일어났다. 이는 곧 합장(合葬)을 바라는 망자(亡者)의 소망임을 알고 결국 남편과 합장을 하였다. 당시 남편의 뒤를 따른 이씨의 소식을 전해 들은 경상도의 유림 400여 명이 연명으로 조정에 상소를 올리자 1772년(영조 48) 조정에서는 정려(旌閭)를 내리고 이씨의 효열(孝烈)을 세상에 널리 알리게 하였다.
[상훈과 추모]
이씨의 정려(旌閭)는 현풍 곽씨 문중의 다른 정려들과 함께 현재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읍 지리 1348-2번지[지동길 3호]에 위치한 현풍 곽씨 십이정려각(玄風郭氏十二旌閭閣)에 봉안되어 있다. 현풍 곽씨 십이정려각은 대구광역시 문화재 자료 제29호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이씨의 남편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 찬술한 「열부 전의이씨 찬(烈婦全義李氏贊)」이 곽종석(郭鍾錫)[1864~1919]의 『면우집(俛宇集)』 권144에 전한다. 1992년 봄에 기단(基壇) 위에 두 개의 사각형 좌대를 올리고 그 위에 높이 150㎝, 폭 215㎝, 두께 20㎝의 「효열부 전의이씨지비(孝烈婦全義李氏之碑)」를 건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