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007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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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大邱 - 祈禱 |
분야 | 생활·민속/민속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박주연 |
[정의]
대구광역시에서 오랜 민간신앙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바위들.
[개설]
대구광역시에 곳곳에서 찾을 수 있는 큰 바위를 통하여 대구 시민들의 민간신앙과 유적에 관한 인식을 엿볼 수 있다.
[서거정이 감탄한 대구의 바위들]
대구 출신의 조선시대 학자 서거정(徐居正)[1420~1488]은 15세기 관학을 대표하는 학자이자 시인 겸 문장가로 꼽힌다. 성리학을 비롯하여 천문·지리·의약에 정통하였고, 문장과 글씨에도 능하여 『경국대전(經國大典)』, 『동국통감(東國通鑑)』,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등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서거정은 명문가의 막내아들로 태어나 19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25세에 관직에 오른 이후 69세의 나이로 생애를 마감할 때까지 관료이자 대문장가로서 한 시대를 풍미하였다. 서거정의 외가는 세도가문이었고, 자형(姊兄)인 최항이 높은 관직에 있어 큰 영향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서거정은 평생의 모든 일 대부분을 시로 남겼으며, 특히 「대구십영(大丘十詠)」과 같은 연시도 많이 남겼다. 「대구십영」은 고향인 대구에 대한 애정을 서거정이 한시로 표현한 것이다. 15세기 당시 대구의 풍광을 잘 표현하고 있어 대구 지역 연구의 중요한 자료다. 1530년(중종 25)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실려 있는데, 대구의 풍광을 10군데 정하여 한시 형식으로 읊었다. 금호강, 삿갓바위, 제일중학교 연귀산, 중구, 성당못, 도동측백수림, 동화사, 팔달교, 팔공산, 오봉산 침산공원 등 대구의 아름다운 자연을 노래하였다.
제1영 금호범주(琴湖泛舟)[금호강에 배를 띄우고], 제2영 입암조어(笠巖釣魚)[입암에서 고기를 낚으며], 제3영 귀수춘운(龜岫春雲)[연귀산의 봄구름], 제4영 학루명월(鶴樓明月)[금학루에서 바라보는 한가위 밝은 보름달], 제5영 남소하화(南沼荷花)[남소에 피어난 연꽃], 제6영 북벽향림(北壁香林)[향산의 측백나무 숲], 제7영 동사심승(桐寺尋僧)[동화사의 승려를 찾아가다], 제8영 노원송객(櫓院送客)[노원에서 손님을 보내며], 제9영 공령적설(公嶺積雪)[팔공산에 쌓인 눈], 제10영 침산만조(砧山晩照)[침산에서 바라보는 저녁노을]로 이루어져 있어 과거와 현재의 아름다움을 비교하는 재미가 있다.
특히 서거정은 대구의 바위들 앞에서 여러 차례 감탄하였다. 예로부터 많은 이들이 기도를 올려 민간신앙이 깃든 바위의 영험함과 거대함이 단순한 아름다움을 넘어 숭고미를 전한다.
[건들바위]
서거정이 노래한 대구10경 중 제2경 입암조어의 장소는 논란의 여지가 크다. 물에 잠겨 사라졌는지, 모양이 변한 것인지 아직 발견하지 못한 것인지 의견이 분분하나 후대의 입장에서 추정할 때 가장 가까운 실물로 알려진 것이 대구광역시 중구 대봉동의 건들바위이다. 대구의 어른들은 ‘건들바우’, ‘삿갓바우’라고도 하며, 대구광역시 기념물로 1982년 6월 29일 지정되었다.
건들바위 앞은 예전에 대구천 물길이 이어졌던 곳인데, 200여 년 전만 하더라도 맑고 깊은 냇물이 흘러 낚시를 즐겼던 명소였다고 한다. 대구향교에서 내려가다 보면 건들바위를 알리는 이정표가 있다. 바위 모양이 갓 쓴 노인 같다고 하여 ‘삿갓바위’라고도 불렸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경치 좋은 명소 중 하나였으며,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무당이나 점쟁이들이 몰려와 치성을 드린 곳으로도 유명하다. 특히 아기를 갖지 못하는 부인들이 치성을 드리면 효험이 있다는 소문에 각지에서 많이 찾아왔다고 하며 지금도 주변에는 일부 무속인의 집들이 남아 있다.
서거정의 한시 「입암조어」는 물가에 있었다고 전해지는 삿갓바위에서 가을날 안개비가 내리는 가운데 바위절벽 아래 소(沼)에서 이루어지는 낚시를 소재로 하고 있다.
연우공몽택국추(煙雨涳濛澤國秋)
수륜독좌사유유(垂綸獨坐思悠悠)
섬린이하지다소(纖鱗餌下知多少)
부조금오조불휴(不釣金鰲釣不休)
이슬비 자욱이 내리는 어두운 호숫가 가을날
낚시 줄 곧게 드리우고 홀로 앉아 한가로이 생각에 잠겼네
미끼 아래 작은 물고기 다소 있음이야 알겠지만
금자라 낚지 못하여 쉬지를 못하네
건들바위는 옆 절벽과 더불어 대구분지의 지반구조를 잘 나타내는 바위이며 지정 면적은 962m²이다. 하천의 침식작용으로 생긴 선바위[하식애]인 건들바위는 약 1억만 년 전 중생대 백악기 때, 호수로 운반되어 온 자갈, 모래, 실트, 점토 등의 물질이 쌓여 이루어진 퇴적암이다. 이후 암벽의 균열과 더불어 대구천에 의한 지속적인 침식작용으로 암벽 본체에서 떨어져 나와 현재의 모습을 보인다. 서 있는 모습이 불안하게 보여 인근 주민들이 ‘건들바위’라고 불렀다는 설, 건들바위의 큰 몸체 위에 작은 바위가 얹혀 있는데 건드리면 건들건들 한다고 ‘건들바위’라 이름하였다는 설 등이 있다.
대구광역시 중구청은 건들바위가 시민들의 쉼터 공간이 될 수 있도록 시설을 새롭게 단장하였다. 우선 1994년 조경공사를 통하여 분수, 계류, 폭포 등을 새로 설치하여 물이 흐르는 옛 정취를 느낄 수 있게 하였다. 2007년 재정비 사업을 통하여 옛 정취를 느낄 수 있도록 꾸며 물이 흐르는 조그마한 실개천과 인공폭포가 흐르고 있다. 또한 2015년에는 높이 9m, 폭 6m 규모의 ‘건들바위 조형물’까지 설치되어 넓은 조망권까지 확보되었다. 특히 건들바위 인근 20m 지점에 야간 경관용으로 설치된 LED 갈대등 30본과 투광기 44개가 어두운 밤거리를 밝히고 있어 볼거리가 넘치는 쉼터로 각광받고 있다. 덕분에 건들바위는 지역 야간 명소로 유명하다. 또한 건들바위는 대구 중구 골목투어 4코스 삼덕봉산문화길 마지막 종점이다. 또 대구도시철도 3호선이 지나기 때문에 도심과 어우러진 색다른 이미지도 선사한다.
[거북바위]
서거정의 10영 가운데 제3영 귀수춘운은 어느 중학교 안에 있다. 대구광역시 중구 봉산동의 제일중학교에는 거북바위가 있다. 거북바위는 바위의 윗 부분이 마치 거북등처럼 쩍쩍 갈라져 있다. 대구 건읍(建邑) 초기에 ‘돌 거북’을 만들어 머리는 남쪽으로 꼬리는 북쪽으로 향하도록 산등성이에 묻어 지맥을 통하게 하였다고 한다. 특히 거북 형상을 만든 것은 앞산이 불의 기운[火氣]이 강해 대구를 화마로부터 지키기 위한 비보 차원에서 행한 것이라 한다.
서거정의 한시 「귀수춘운」은 대구의 진산인 연귀산을 기우제의 산실인 양, 봄 구름과 비를 끌어 들여 봄 가뭄에 대한 강렬한 기우를 담은 칠언절구이다.
귀잠은은사오잠(龜岑隱隱似鼇岑)
운출무심역유심(雲出無心亦有心)
대지생령방유망(大地生靈方有望)
가능무의작감림(可能無意作甘霖)
거북 뫼 은은하여 자라 뫼 닮았네
무심히 피어난 구름 또한 의미가 있네
바야흐로 대지의 생명과 영혼들이 바라는 것처럼
아무 뜻 없이 단비를 내리겠네
경사진 정문 도로를 20m 정도 올라가면 제일중학교 본관 건물이 나타나며, 본관 건물과 운동장 사이에 5평 정도 정원이 조성되어 있다. 정원에는 보호수로 지정된 목서나무와 히말라야시다가 있다. 특히 2016년 12월 16일 보호수로 지정된 목서나무는 향기가 일품이다.
두 나무 사이에 거북바위가 표지석과 함께 놓여 있다. 중앙의 머리는 앞산을 향하고, 꼬리는 팔공산을 향한 채 거북바위가 묻혀 있다. 거북바위는 길이 177㎝, 높이 60㎝, 무게 1.94톤 가량으로 대부분 땅에 묻혀 있고 땅 위로는 5㎝ 정도밖에 드러나지 않았다. 연한 자줏빛의 모래 질 암석인 자색(紫色) 사암에 거북 형상을 새겨 놓았다. 여러 곳에 성혈이 있고 윗부분에 줄홈이 가로 세로로 파여 거북등을 연상시키며, 타원형의 바위 전체의 모습이 거북이 엎드린 형상을 닮아 ‘거북바위’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바로 곁의 표지석에는 연구산 거북바위 유래가 적혀 있다. “옛날 이곳은 연구산으로 불렸고, 한편으로 월견산, 오포산이라고도 한다. 연구산은 대구의 진산으로, 건읍 초기에 ‘돌거북’을 만들어 머리는 남쪽으로 꼬리는 북쪽으로 향하도록 산등성이에 묻어 지맥을 통하게 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대구 출신 조선 최고의 문장가 서거정의 「대구십영(大丘十詠)」 중 제3경의 배경이 되는 곳이다. 거북바위에는 청동기시대 고인돌에서 볼 수 있는 성혈 또는 별자리를 나타내는 구멍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고인돌의 상석으로 추정된다. 후대에 거북등 문양과 거북머리를 새긴 것으로 보이며, 만든 시기는 조선시대 초기 이전으로 추정된다. 거북바위는 대구의 지맥을 잇거나 기우제를 지내기 위한 용도에서 비롯되었다고 전해진다. 일제강점기와 개발 과정에 거북바위는 원래와 달리 머리와 꼬리의 방향이 바뀌었으나, 2003년 11월에 ‘달구벌 얼 찾는 모임’에서 지금과 같이 위치를 바로잡았다. 이 거북바위는 여러 가지 전설을 간직한 채 오늘날까지 그 모습을 전함으로써 후손에게 옛 조상의 정서와 숨결을 느끼게 하는 대구의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일제강점기 당시 연귀산 자리에 대구여자상업고등학교가 들어서면서 돌거북은 여기저기로 옮겨지는 수난을 겪어야 했다. 그러다 학교가 대구제일여자중학교[현 대구제일중학교]로 바뀌자 학교 서편 화단 앞에 원형 일부가 훼손된 채로 머리가 동쪽으로 향한 채 방치되어 있었다. 돌거북의 내력에 대해 알고 있는 일부 시민들이 항상 거북의 원상복구를 염원하였으며, ‘달구벌 얼 찾는 모임’에서 2003년 11월 19일 오전 10시, 연귀산(連龜山) 자리에 놓였던 돌거북[石龜]을 제자리에 바로 놓는 사업을 하였다. 대구제일여자중학교에서 회원들과 학계, 대구광역시 관계자 등 지역 인사들이 참여한 가운데 ‘연귀산 돌거북 바로놓기’ 행사 사업으로 돌거북을 과거 원 위치와 가장 근접할 것으로 추정되는 학교 건물 가운데 화단 앞에다 머리를 남쪽 방향으로 땅에 묻고 꼬리는 팔공산 쪽으로 향하도록 하였다.
현재 거북바위가 놓인 제일중학교는 지역 사회의 문화·예술 인프라가 잘 갖추어져 있는 곳이어서 학교 근처인 봉산문화거리와 함께 둘러보기에 좋다. 학교를 나서면 만나게 되는 20여 개의 화랑에 전시된 작품을 감상하면서 「대구십영」의 제3경을 찾아가 보는 것도 알맞은 코스다.
[칠성바위]
대구광역시의 북구 칠성동에는 북두칠성처럼 자리 잡고 있었던 청동기시대의 고인돌들이 있다. 대구역 뒤편 광장인 대구광역시 북구 칠성동2가 302-113에 있는 선사시대의 흔적이다.
원래 칠성바위는 칠성동2가에 흩어져 있던 청동기시대의 고인돌 일곱 개가 하늘의 북두칠성(北斗七星)처럼 자리 잡고 있었다고 한다. 칠성바위는 조선 정조 때 경상감사로 부임한 이태영과 관련 있다. 어느 날 이태영이 꿈에서 읍성에 북두칠성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깨어나 그 장소에 가니 바위 일곱 개가 북두칠성처럼 놓여 있었다고 한다. 마침 일곱 아들이 있었던 이태영은 신기하게 여겨 바위마다 아들 이름을 새기고 복을 빌었다는 것이다. 장남 이희갑 바위를 중앙에 두고 여섯 개의 바위가 방사형을 이루고 있는 셈이다. 경삼감사 이태영은 일곱 아들 이름을 제일 동쪽에 있는 바위에서부터 ‘희갑(羲甲)’, ‘희두(羲斗)’, ‘희평(羲平)’, ‘희승(羲升)’, ‘희준(羲準)’, ‘희조(羲肇)’, ‘희화(羲華)’의 순으로 이름을 새겼다. 지금도 다양한 크기의 바위들에는 정말 이름들이 적혀져 있어 궁금증을 자아낸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희한하게도 일곱 아들이 장성함에 따라 그 아들들의 성품이 각각 자기 이름이 새겨진 바위를 닮아 갔다고 한다. 울퉁불퉁하고 험상궂게 생긴 세 개의 바위에 이름이 새겨진 세 아들은 문과(文科)에 올라 출세를 하였다. 그리고 평범한 바위에 그 이름이 새겨진 한 아들은 벼슬을 못 하고 평범한 일생을 마쳤다. 특히 중앙에 있는 맏아들 이희갑바위는 표지석 뒤편 중앙에 있는 바위이며, 일곱 개의 바위 중 가장 잘 생기고 문(文)의 기운을 품고 있다. 한산이씨 족보에 의하면 문과 급제하여 ‘의금부보국판보국 중추부사’ 관직을 역임하였다고 한다.
둘째아들인 이희두(李羲斗)는 문과 급제하여 ‘좌찬성[의정부 종1품]’ 관직을 역임하였다고 한다. 그 후 둘째아들 이희두가 1802년(순조 2)에 선산부사(善山府使)가 되어 내려 갔을 때 아버지의 치적을 길이 전하기 위하여 칠성바위 주변에 나무를 심고 중앙에 정자를 세워 ‘의북정(依北亭)’이라고 하였다. 그 뒤로 멀고 가까운 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칠성바위 앞에서 부귀다남(富貴多男)을 빌었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의북정은 퇴락하여 허물어졌다.
칠성바위는 흔히 고인돌이라 부르는 지석묘로 여겨지는데 일반적인 고인돌이 땅속에 고귀한 사람을 묻은 후 뚜껑처럼 덮어놓은 거대한 바위라면, 칠성바위는 무덤으로서의 성격보다는 거석기념비적인 것으로 추정된다. 대구도시철도 1호선 대구역 4번 출구에서 칠성시장 쪽 방향으로 올라가면 칠성바위를 쉽게 찾을 수 있다. 칠성바위는 대구광역시 북구 지역의 선사시대를 연구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바위를 찾는 사람들]
오랜 세월 한 자리에 우뚝 서 있는 거대한 바위들은 유한한 삶을 사는 인간을 숙연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그래서인지 대구광역시 곳곳에는 변치 않는 기도처인 바위들이 여럿 있다. 대구광역시 동구 진인동의 팔공산 갓바위는 보물로 지정된 관봉석조여래좌상 앞에서 정성스럽게 기도를 올리는 사람들로 사시사철 붐빈다. 중구 대봉동에는 대구광역시 기념물인 건들바위가 있으며 한때 건들바위 곁에는 국내 최초의 무속 전문 박물관인 건들바우박물관이 존재할 정도로 무속신앙의 뿌리가 깊은 곳이다. 일곱 아들의 이름을 새긴 대구광역시 북구의 칠성바위는 칠성동의 유래가 되어 현재까지 전하고 있다. 달구벌의 얼이 담긴 연구산 거북바위는 시민들의 염원을 담아 제자리를 찾게 되어 중구 대봉동을 지키고 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수성구의 파동 바위그늘 유적까지 인간의 삶에 바위가 주는 영향은 결코 적지 않다. 변함 없음을 기원하는 사람들에게 대구광역시의 바위 유적이 변치 않고 지켜질 수 있도록 보존하여야 할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