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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2572
한자 金應燮
영어공식명칭 Kim Eungseop
이칭/별칭 김응범(金應範),경장(景章),동전(東田)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장세윤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78년 11월 10일연표보기 - 김응섭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5년 - 김응섭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회 가입
활동 시기/일시 1919년 - 김응섭 파리장서운동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20년 - 김응섭 한족회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24년 - 김응섭 한족노동당 결성
활동 시기/일시 1930년 - 김응섭 재만한인반제국주의동맹 결성
몰년 시기/일시 1957년 5월 29일연표보기 - 김응섭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98년연표보기 - 김응섭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출생지 오미리 -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
활동지 대구 - 대구광역시
활동지 중국 - 중국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남성
대표 경력 대한민국임시정부 법무차장

[정의]

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개설]

김응섭(金應燮)[1878~1957]은 1900년대 초 대구에서 교남교육회, 조선국권회복단 등에서 활동했다. 일제강점기에는 파리장서운동에 참여하고 중국 동북[만주]에서 의용단, 정의부 간부로 활동하는 등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가계]

김응섭의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경장(景章), 호는 동전(東田)이며, 이명은 김응범(金應範)이다. 1878년 11월 10일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에서 태어났으며, 독립운동가 김지섭 일가이다.

[활동 사항]

김응섭은 1908년 서울의 경상도 출신 인사들이 주축이 되어 설립한 교남교육회의 임원으로 참가하여 국권 회복을 위한 교육 구국운동에 앞장섰다. 1911년 1월부터 1912년 6월까지 평양지방법원의 검사로 일하였으나, 사직하고 대구에서 변호사로 활동하였다.

1915년 2월 말 서상일(徐相日) 등이 대구 안일암(安逸庵)에서 결성한 비밀결사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회[일명 재건 달성친목회]에 가입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는 등 독립운동에 매진하였다. 1919년 4월에는 곽종석(郭鍾錫)·장석영(張錫英)·김창숙(金昌淑) 등이 주도한 파리강화회의 독립청원운동[일명 파리장서운동]에 참여하며, 대구에서 서상일·윤상태(尹相泰)와 함께 독립운동 자금 모집, 독립청원서 작성 및 전달 방안 등을 모의하였다. 그 후 프랑스 파리에 보낼 독립청원서를 휴대하고 대구를 출발하여 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갔다. 이때 서상일·윤상태 등이 모금한 5,000원의 거금을 독립운동 진영에 전달하였다.

김응섭은 상하이에 도착한 직후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회의에 참가하여 정부 명칭과 헌장 제정에 기여하였다. 이후 잠시 대한민국임시정부 법무차장을 맡았으며, 의용단(義勇團)에 참여하여 1919년 말에서 1922년 말까지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이후 김동삼 등과 함께 중국 동북지방으로 이동하여 지린성[吉林省] 류허현[柳河縣]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특히 남만주의 대표적 독립운동 조직이자 한인 교민 자치조직인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 참여하여 이주 한인들의 정착과 생활 향상 등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1920년 3월 류허현 산위안바오[三源堡]에서 독립운동 조직인 한족회(韓族會)에 참여하여 조직을 쇄신하고 법률 부문 책임자인 법무사장(法務司長)으로 활동하였다.

김응섭은 또한 서로군정서 부총재로 활동하면서 연고지인 경상북도 지방에 지인이나 밀사를 파견하여 군자금 모집과 비밀결사 투쟁을 전개하였다. 1919년 말 대구 출신으로 중국 군관학교를 나온 최윤동(崔胤東)을 포섭하여 최윤동과 국내에서 의열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여비 70원을 지급하여 대구로 돌아가게 하였다. 그 뒤 밀사 김의삼(金義三)을 통하여 폭탄 3개를 최윤동에게 전달하였다. 1922년 4월에는 경상북도 영주 출신의 김찬규(金燦奎)를 만나 권총과 실탄을 지급한 뒤 경상북도 지역으로 파견하여 군자금 모집과 국내외 연락을 담당하게 하였다.

이 무렵 김응섭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등을 시찰하고 국내외 동지들과 교류하였으며, 점차 사회주의 사상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에 1921년 연해주에서 활동하던 이르크츠크파 고려공산당에 입당하였다. 1922년에는 시베리아의 베르흐네우진스크 고려공산당연합대회에 출석하여 임시집행부 위원이 되었다. 1923년 김원봉(金元鳳)이 주도하던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였고, 6월 상하이에서 열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민대표회의에 참가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비판적인 창조파의 일원으로서 국민위원회 결성에 합류하였다. 1924년 11월 남만주에서 한인 교민 자치조직이자 독립운동 조직인 정의부(正義府)가 창립되었는데, 김응섭은 중앙심판원장을 맡았다. 12월에는 지린성 판쓰현[盤石縣]에서 이광민(李光民) 등과 함께 한족노동당을 결성하고 중앙의사위원회 위원장, 상무집행위원장 겸 중앙집행위원이 되어 활동하며 기관지 『노동보』 발행을 주도하였다.

1920년대 후반부터 만주 지역의 사회주의운동이 고조되면서 1926년 5월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이 결성되었는데, 김응섭은 1921년 9월경 간부가 되었다. 1928년 2월 한족노동당을 개편하여 재만농민동맹(在滿農民同盟)을 결성하고 중앙집행위원장이 되었다. 1920년대 후반에는 만주의 여러 독립운동 단체들을 통합하는 ‘민족유일당운동’이 일어났다. 이에 호응하여 1928년 5월 지린성 판쓰현 등지에서 ‘전민족유일당조직 촉성회의’가 열렸는데, 김응섭은 재만농민동맹 대표자로 참석하여 기존 단체의 권위를 부정하고 개인 본위의 통합을 주장하였다. 1928년 7월 정의부를 탈퇴하여 김동삼 등과 함께 만주 지역 통합조직인 ‘혁신의회(革新議會)’를 조직하고 항일투쟁을 지속하였다.

김응섭은 1930년 1월 김동삼·김원식 등과 함께 재만한인반제국주의동맹을 결성하였다. 이는 당시 한인들의 가장 시급한 당면 과제였던 토지소유권 문제와 반일 반봉건투쟁, 한국 독립 문제를 연계하여 투쟁 방향을 제시함으로써 보다 많은 한인 대중의 지지와 성원을 도모하고자 한 것이었다. 이러한 남만주 지역에서의 농민동맹과 반제동맹 등 대중단체 활동은 1930년대 초 중국공산당 만주지부 조직 성립의 기초가 되었는데, 향후 중국공산당 만주 조직이 주도하는 항일유격대와 동북인민혁명군, 동북항일연군 형성의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김응섭은 광복 후 전국유교동맹 대표로 1948년 4월 하순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하였으며, 1957년 5월 29일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김응섭의 저술로는 1954년 저술한 미간행 필사본 『77년 회고록』이 있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김응섭의 공적을 기려 1998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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