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27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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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呂學龍 |
영어공식명칭 | Yeo Hakryong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임삼조 |
활동 시기/일시 | 1941년 5월 - 여학룡 국민학교 3종 훈도자격시험 합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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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46년 - 여학룡 경상북도 화동국민학교 근무 |
활동 시기/일시 | 1947년 - 여학룡 대구 복명국민학교 근무 |
수학 시기/일시 | 1947년 9월 - 여학룡 대구사범대학 입학 |
수학 시기/일시 | 1951년 3월 - 여학룡 대구사범대학 졸업 |
활동 시기/일시 | 1951년 4월 - 여학룡 대구 계성고등학교 근무 |
활동 시기/일시 | 1951년 9월 - 여학룡 상주중학교 근무 |
활동 시기/일시 | 1952년 3월 - 여학룡 대구제삼중학교 근무 |
활동 시기/일시 | 1953년 3월 - 여학룡 대구 경북여자고등학교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960년 5월 7일 - 여학룡 대구지구중고등학교교원노동조합 부위원장 선임 |
활동 시기/일시 | 1961년 4월 9일 - 여학룡 이대악법반대투쟁 결의 |
활동 시기/일시 | 1961년 11월 30일 - 여학룡 혁명재판소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형 언도 |
출생지 | 이소리 - 경상북도 상주시 화동면 이소리 |
학교|수학지 | 대구사범대학 - 대구광역시 |
활동지 | 대구 - 대구광역시 |
성격 | 민주화운동가 |
성별 | 남성 |
대표 경력 | 대구지구중고등학교교원노동조합 부위원장 |
[정의]
1960년대 대구에서 활동한 민주화운동가.
[개설]
여학룡(呂學龍)[?~?]은 지금의 경상북도 상주시 화동면 이소리에서 태어났다. 대서 교사로 근무하며 이대악법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활동 사항]
여학룡은 1941년 5월 국민학교 3종 훈도자격시험에 합격하여 함경북도 학서국민학교에서 근무하였다. 1946년 경상북도 화동국민학교를 거쳐 1947년 대구복명국민학교[현 대구복명초등학교]에서 근무하였다. 1947년 9월 대구사범대학에 입학하여 1951년 3월 졸업한 뒤 4월에 대구 계성고등학교 교사가 되었고, 9월에는 상주중학교에서 근무하였다. 1952년 3월 대구 대구제삼중학교[현 경상중학교], 1953년 3월 대구 경북여자고등학교에 부임하였다. 1960년 5월 7일 대구지구중고등학교교원노동조합 부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여학룡은 1960년 4·19혁명 이후 4월 29일 경북여자고등학교 교사인 서성은·손종섭 등 60여 명의 교사들과 함께 경북여자고등학교에서 교원조합결성준비원회를 결성하였다. 1960년 5월 7일 대구상업고등학교[현 대구상원고등학교] 강당에서 대구 시내 43개 중고등학교 교원 284명이 ‘대구지구중고등학교교원노동조합 결성총회’를 개최하여 여학룡과 김문심을 임시의장으로 선출하였고, 교원조합결성준비원회에서 채택된 7개 항의 강령과 전문 47조의 조합 규약을 수정 없이 통과시켰다. 이후 대구지구중고등학교교원노동조합 위원장에 김장수, 부위원장에 여학룡과 송영기를 선출하였다. 대구지구중고등학교교원노동조합은 한국전쟁 이후 처음으로 생겨난 교원노동조합이었다.
여학룡은 1961년 3월 15일 대구남산공립국민학교[현 대구남산초등학교]에서 개최된 전국교원노동조합 경상북도연합 주최 대의원대회에서 이목 등 약 100명과 함께 교원노동조합운동을 말살하려는 이대악법을 즉시 철회하라는 요지의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4일 뒤인 1961년 3월 19일 대구노동회관에서 열린 경북교원노동조합연합회 대의원대회에서 이목·신우영 등 30여 명과 함께 반공법[반공임시특별법] 및 데모규제법을 즉시 철회하라는 요지의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1961년 4월 9일 대구여자중고등학교 강당에서 개최된 전국교원노동조합대표자대회[한국교원노동자조합대표자대회]에서도 여학룡은 이목·김장수·신우영·조영진 등과 함께 반공법·데모규제법을 즉시 철회하라는 결의문을 채택하고 이대악법반대투쟁을 결의하였다. 전국교원노동조합대표자대회에는 약 600여 명의 각 지역 교원노동조합 대표와 교원이 참여하였다. 여학룡은 교원노동조합원과 함께 대구여자고등학교에서 출발하여 대구역 광장을 경유, 북성로 대구경찰서 앞을 지나 교원조합사무실로 시가행진을 하면서 이대악법반대투쟁을 전개하였다.
여학룡은 1961년 5·16 군사 쿠데타 이후 체포되었고, 1961년 11월 30일 혁명재판소에서 「특수범죄처벌에 관한 특별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형을 언도받고 출소하였다.